온라인게임 현거래 시장과 완전경쟁시장의 비교


  경제학에서의 완전경쟁시장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1. 시장 내에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존재한다.

2. 공급되는 재화의 질은 동일하다.

3. 시장으로의 진입과 이탈이 자유롭다. (자원의 이동에 제약이 없다.)

4. 수요자와 공급자는 모두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건을 엄밀하게 충족하는 시장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경쟁시장은 이상적인 시장 모델로서 다른 시장 모델이나 현실 시장과의 비교를 위하여 설정해 둔 모형이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라고 하는 재미없는 미시경제학 교재를 읽고 있던 도중, 갑자기 제 머리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완전경쟁시장과 온라인게임 아이템 현금 거래 시장(이하 현거래시장)과의 비교였습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거래시장은 이미 2006년 1조 이상의 거래액을 보이고 있는 상당히 거대해진 시장입니다. 그런데 이 시장이 완전경쟁시장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현거래시장의 특성을 완전경쟁시장의 조건에 맞추어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장 내에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존재한다.

  현거래시장에서 한 번이라도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팔아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시장에서는 항상 끊임없는 매각(현처분)과 매입(현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 년에 몇천억 건 이상의 거래량을 보여주는 이 시장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따로 나뉘지 않습니다. 아이템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판매를 마음먹으면 곧 공급자가 되고, 자신이 생산하는 수준 이상의 아이템을 원할 경우 이 사람이 곧 수요자가 됩니다. 게다가 이 둘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현거래시장의 수요자와 공급자는 구분되지 않는 형태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시장 내에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작업장'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아이템 제조·획득을 맡은 공급자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시장 전체의 크기에 보았을 때 이들이 가격조정에 개입할 정도의 크기가 되지는 못합니다(또한 온라인게임의 특성상 속칭 이러한 '시세조작'행위는 금방 발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모든 공급자는 일명 '시세'라고 불리는 시장에서 합의된 아이템 가격에 맞추어 아이템을 공급하게 되므로, 가격 수요자의 위치로 시장 내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는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 공급되는 재화의 질은 동일하다.

  온라인게임의 재화라면 크게 게임 내의 아이템과, 게임 캐릭터·계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화 중에는 물론 특수하게 능력치를 높인 아이템이나 타 캐릭터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캐릭터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별화된 상품은 모두 게임 내의 화폐(이하 게임머니)로 환산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 내의 아이템·캐릭터는 해당 게임 내에서 부여된 가치가 존재합니다. (희귀한 아이템의 경우 능력치를 따라서 정해진 가치 이외의 프리미엄이 더 부가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른 기준의 가치나 효용도 모두 게임머니로 환산되는 과정에서 반영되어 거래되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게임머니로 환산하고, 그 게임머니가 가지는 일정한 가치를 현금으로 매각·매입하는 과정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차별화된 상품은 실제로는 동질한 게임머니를 거래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거래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재화는 실제로 동질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3. 시장으로의 진입과 이탈이 자유롭다. (자원의 이동에 제약이 없다.)

  현거래는 그 특성상 거래 시에 요구되는 추가 비용이 없습니다. 아이템을 팔기 위하여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을 필요도 없고, 운송비나 재고 보관비가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는 무형의 자산이기 때문에 시간·공간의 제약이 없이 빠른 이동이 가능합니다. 게임상에서 가지고 있는 게임머니를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게임머니를 재화로 인식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 유저라면 누구나 현거래시장으로의 진입과 이탈이 자유롭습니다.

단 중개사이트에서 게임머니를 거래할 때 수수료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서 위의 가정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거래 시에 실시간으로 구입·판매와 그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엄밀하게는 위의 가정에 위배되겠지요. 하지만, 이 두 가지 제약은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도 될 만큼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간을 나노초 단위까지 구분해가면서 조건을 따진다면 모를까…….


4. 수요자와 공급자는 모두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국내 현거래시장의 90% 이상은 주로 두 곳의 현거래 사이트(아이템매니아, 아이템베이)를 통하여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이템매니아 화면 캡처
  위의 스크린 샷은 아이템매니아의 거래화면입니다. 주로 판매자가 거래물품과 가격을 제시하고, 구매자가 그것에 따라 입찰을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정 게임을 고른 이유는 제가 하고 있는 게임이라…… -_-;;) 그런데 이와 같은 거래정보는 모두에게 공개되어있고, 그 거래 기록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어서 해당 게임머니를 재화로 인식하는 사람들, 즉 현거래 의지가 있는 온라인 게임 유저들은 위의 정보로 자신이 팔고자(또는 사고자) 하는 아이템의 시장 가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좌측에 보이듯이 게임머니의 현금 환산가치까지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거래시장은 수요자와 공급자 양쪽 경제주체 모두가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제가 보기에는) 현거래시장은 완전경쟁시장의 요소를 상당 부분 충족하고 있는 시장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장의 형태와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시장이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어서 조금 놀라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제 경제학을 배우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직 모르는 부분에서 무언가 요구되는 조건이 더 있거나 제가 잘못 생각하여 오류를 범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이렇게 취미생활과 연결해 -_-; 경제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솔직히 친해지기가 쉬운 친구는 아니라서 이렇게라도 친해지는 게 정말 반갑네요. -_-a

p.s. 3월 28일 글 내용 중 봉건씨가 지적해준 문맥적으로 어색한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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