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소유나 존재냐 책 표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처음 보고 난 뒤 보름이 지나서야 책의 끝 부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완독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 이유로 저의 게으름이 제일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다른 이유로는 이 책의 내용이 이해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또 그만한 노력을 해 읽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생각 외로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분량으로는 채 300쪽이 되지 않는 평범한 두께에 책에 이토록 오랜 기간을 빼앗긴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몇 년 전 고등학교 때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책 덕분에 처음 이름을 알게 된 분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에게서 그리 인상적인 느낌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하면서 간단히 책장을 넘겨 덮어버리고 한동안 관심을 끊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대학교에 와서 오세철 교수님의 '사회심리학'수업을 듣는 도중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또는 올바른 해석)에 공헌한 여러 심리학자, 사상가의 이름과 그 이론의 기초를 간단히 언급하시며 칠판에 여러 이름을 써 나가는 도중 Erich Fromm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어?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나? 의외네'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물론 수업시간에 그 이상 에리히 프롬이 언급되던 일은 없었지만,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도 다시 익숙한(?) 이름에 대한 반가움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있잖아요 타지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솟구치는 반가움 같은 느낌 ㅋ


  '소유나 존재냐'에서는 실존양식으로서의 방법으로 크게 '소유'와 '존재'를 들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는 이 두 실존양식의 차이점과 그 차이의 근본을 다각도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방면에서 분석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내용을 제가 좋아하는 세줄 요약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렵겠습니다만, 이를 최대한 둥글게 말해보자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주위 사물의 소유를 통하여 그로부터 자신의 실존을 이끌어내는 수동적인 자아 형성 방법이고, 존재적 실존양식은 사물 자체와의 경험과 일체감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자아 형성 방법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소유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편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사회가 애초에 '소유의 사회'이기 때문에 소유적 실존양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판단 기준이 객관적이고 눈에 드러나는 사회적 지위, 재산 등이 제일 큰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준에 있어서는 당연한 말입니다. 이 책은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가 본질적인 '우리'가 아닌, 주위에 존재하는 물건으로 그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처음 접하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당연하게 떠올라야 하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위, 재산 등과 같은 현대사회의 인간 판단 기준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우리가 붙잡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로 자신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은 페르소나가 자신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되네요.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은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져서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소유=수동적=나쁜 것이라 규정해 두고 그 반대편에 존재=능동적=좋은 것이라는 개념을 규정하여 무조건 그에 맞추어 글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요. 어찌 보면 소유와 존재라는 두 실존양식을 너무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어서 저같이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존재적 실존양식은 사람이 사람 또는 사물에 대해 경험하고 사물 그 자체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질 때 실현할 수 있는 양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비싼 돈을 주고 키보드를 구입하여 자랑하기 위해 '내 소장품'이라고 블로그에 자랑하고 구석에 봉인해 두는 모 블로그 주인장 같은 경우가 소유적 실존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고, 그 키보드를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그 키보드의 기능과 성능을 체험하는 등 그와 관계하여 해당 사물에 대한 실체와 가까워지는 것이 존재적 실존양식이 되겠죠(여담이지만, 이 글은 최근 새로 산 키보드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봉인해두지 않았어요 ㅠㅠㅋ).

  이 책 중간에도 나오지만,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이와 같은 소유와 존재의 실존양식에 대해 직관적으로 파악하려면 이 책 보다 차라리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이 더욱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 자체가 기독교적 전통이 바탕이 되는 서양문화권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가르침과 가까운 이론을 전개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책에서는 원시 기독교나 불교, 철학에서도 이와 같은 존재의 실존양식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불교만큼 이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있는 쪽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 중간에 나오는 소유의 실존양식 및 그것을 벗어나려는 욕심도 소유의 일부분일 수 있다는 문구는 제행무아(諸法無我)와 비슷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가능하다는 부분은 마치 제법무상(諸法無常)의 가르침과 유사한 듯하고요. 물론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실존양식이라는 말 자체도 인세의 헛된 집착이고 불성의 통찰을 통한 성불로 윤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책의 가치와 같다고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유의 헛됨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생겨난 현 사회체제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부분까지는 어느 정도 같은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새로운 인간상과 새로운 사회상에 대한 저자의 제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지금과 같은 소유의 실존양식에 구조를 두고 있는 한 이 사회가 개혁되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바꾸어 나가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파시즘적 모습을 보이며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근본적인 구성원 의식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나옵니다. 이 부분을 보며 사회심리학 수업 중 왜 에리히 프롬의 이름이 기초적인 이론 제공자에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그 근본정신과 다르게 산업사회의 소유적 가치관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 것처럼, 사회주의 역시 마르크스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기계적으로 차용하여 인간을 주체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구조가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사회제도가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겠네요.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소 실망스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있다. 등에 날개만 생긴다면'이라는 다소 우스운 말이 생각나서입니다. 물론 구성원들의 의식이 그렇게 바뀌어서 사회가 개혁된다면 분명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지금 사회의 병폐가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어떻게'할 것인가가 궁금하네요. 사람들을 다 잡아들여서 뇌수술을 할 것도 아니고……. 성리학적 질서를 이 땅에 도입하여 근본적인 의식개혁을 하려다 결국 그 실험을 실패로 끝내야 했던 조상들을 둔 나라에서 태어나서인지는 몰라도, 저러한 구성원들의 근본적 의식 개혁은 사회 개혁을 제일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그만큼 달성되기 요원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성원들의 의식 개혁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사회 개혁 역시 불가능하다는 이 책의 주장도 맞는 말인 듯합니다. 그래서 더 머리가 아프네요.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의식 개혁을 이루기도 불가능해 보이고, 그렇다고 강제로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불가능해 보이고……. 작년에 오세철 교수님의 강의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감상을 말해보라고 할 때, '이 수업에서 배운 내용은 물론 아주 훌륭한 내용이고, 이대로 실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소 뜬구름을 잡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것이 실현되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워 보이고 방법도 피상적인 것 같습니다.'의 요지로 말할 때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과거 조선의 성리학자들이나 현재의 정치학자들, 사상가들, 종교가들 역시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천 년간의 역사 진행과정을 보아 오면 느리기는 해도 분명 의식이 바뀌어 오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예를 들어 예수님이 2천 년 전 태어나셔서 처음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을 때만 해도 저것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인권이라는 이름 하에 평등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현재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새로운 사회제도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가 과연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마치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랑과 평등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과 같이)은 지금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철옹성처럼 보이는 현대의 가치들도 언젠가는 변하게 될 테니 말이지요. 그런 면에서 현 사회의 문제점과 그를 해결하면 바뀌게 될 사회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한 이 책은 한 번쯤은 읽고 이에 대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간만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아서 좋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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