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소라 (sola)
애니메이션 취향은 딱히 이것저것 가리지는 않는 편입니다만, 요즘 들어 분위기가 차분한 작품을 보는 쪽을 약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물론 아무거나 다 보기는 합니다만;;; 이런 분위기의 작품을 상대적으로 좀 더 신경 써서 찾아보는 것도 사실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감상문을 쓸 소라 역시 그런 이유로 접해보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잔잔한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과는 약간 다르게 상당히 변화가 큰 줄거리와 빠른 속도의 진행이 이어지더군요.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약간 달랐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 앞으로의 이야기에는 애니메이션의 주요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직 감상하지 않은 분들은 주의해 주세요.
sola
1. 완성도
딱히 흠잡을 곳은 없는 구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3화라는 짧은 분량(물론 DVD특전 형식으로 2화가 추가되기는 하지만, 주요 줄거리와는 상관없는 말 그대로의 '특전'영상입니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다룰 경우 대개 지나치게 줄거리를 벌여 놓다 최종화 즈음에서 급하게 뒷수습을 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화까지 큰 흔들림 없는 전개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적당하고, 주요 인물 외에 등장하는 주변부 인물의 비중 역시 적절하다고 생각되네요.
무엇보다 이와 비슷한 부류의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안정된 전개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에 제일 놀랐고, 또 제일 큰 평가를 해 주고 싶습니다. 일상생활과 비슷하게 전개되는 듯 하지만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주요 소재가 작품 내에 등장하고, 그에 영향을 받아가며 작중 인물들이 변화해 가는 이런 작품들은 이상할 정도로 끝마무리가 엉성하거나, 갑작스러운 경우가 많죠. 개인적으로 그런 작품들은 게임, NT노벨, 만화 등을 원작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은 했는데, 방대한 분량의 원작에 비해 짧은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모두 내고 싶어 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게다가 다른 매체들에 비해 애니메이션은 정보의 시간당 전달 효율이 상당히 떨어지는 작품 형태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훨씬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여담이지만 예전에 나왔던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イリヤの空、UFOの夏)을 볼 때 이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이건 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따라서 다른 미디어 믹스(일본식의 メディアミックス)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로 전개되는 소라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는 상당히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이거 급 마무리하고 끝입니다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 애니메이션은 따로 원작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이 애니메이션 자체가 원작이고 이를 바탕으로 만화책 등이 나오는 형태더라고요. 기존의 어떤 틀에 구애받지 않고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를 만들어서 안정적인 마무리가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이 작품의 경우 마무리가 부실했다면 원작의 핑계를 댈 수도 없는 작품이겠군요 ㅋ 아무튼 애니메이션이 다른 매체의 작품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만으로 이렇게 안정적인 형태를 보여준 것이 너무 기쁩니다. 특히 다른 매체의 작품을 굳이 찾아보지 않는 저로서는요.
2. 줄거리
장문의 감상문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런 종류의 작품은 줄거리를 쓰지 않으면 전달에 있어 어색하기에 결국 간단히 줄거리를 써야 할 듯싶습니다 ㅠㅠ 하늘을 보기 좋아하는 하늘빠…… 모리미야 요리토(森宮依人)는 새벽하늘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공원에 갔다 이상한 여자아이를 만납니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시호 마츠리(四方茉莉)인데, 요리토는 왠지 모르게 그 아이에게 끌리게 되어 계속 신경을 쓰며 주의를 기울이다 그가 카미카와 마유코(神河繭子)라는 여자아이와 함께 다니는 남자인 츠지도 타케시(辻堂剛史)에게 공격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마츠리를 집에 데려옵니다. 그리고 마츠리가 공격을 받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야화(夜禍)라고 불리는 다른 존재로,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이고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햇빛(정확히는 직사광선인 듯합니다)을 받을 수 없는 자입니다. (야화의 원형은 흡혈귀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단 작품 내의 야화는 흡혈을 하거나 십자가를 무서워하지는 않네요 ^^;) 그 후 요리토와 같은 반 친구이자, 서로의 가족이 같은 병원에 입원한 인연으로 자주 만나게 된 이시즈키 마나(石月真名)가 이를 알게 되나, 마나는 무언가의 사정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숨겨줍니다.
그런데 마나의 동생인 이시즈키 코요리(石月こより)와 함께 입원 중인 요리토의 누나, 모리미야 아오노(森宮蒼乃)가 마츠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오노 역시 야화였음이 밝혀집니다. 아오노와 마츠리는 과거에 알던 사이였지만, 아오노는 마츠리가 요리토에게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리토를 조종하여 마츠리를 칼로 찌르고 요리토의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요리토가 기억이 지워진 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이 마츠리는 마유코를 만나 타케시가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가 야화인 마유코를 인간으로 돌리고자 해서임을 알게 되고, 그 후 마유코의 만류로 인해 타케시는 마츠리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요리토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기억을 찾고,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영문 모를 일들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진실을 원하게 됩니다. 누나인 아오노는 이를 숨기려고 하지만, 마츠리에 의해 요리토는 자신이 예전에 죽었던 진짜 요리토를 대신해 아오노가 만든 종이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때 비관하여 자살한 아오노를 야화로 만든 마츠리는 이 모든 일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자 요리토와 협력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오노를 인간으로 되돌립니다.
줄거리 자체는 딱히 뛰어나다고 할 부분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요즘 나오는 다른 작품과 큰 차별을 둘만한 요소가 존재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줄거리를 13화 안에 잘 갈무리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마음에 듭니다. 또한 위의 줄거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품 배경 자체가 설명과정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데다가 전개과정 중간마다 갑작스러운 내용 변화가 나타나는 모양으로 줄거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의 완급을 잘 조절하며 무난하게 끝을 냈다는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3. 줄거리에 대한 생각
야화라는 설정 자체는 크게 새로운 소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불멸자로서 겪을 고독함에 관한 것이나 남들과 다른 존재로서 겪어야 할 외로움 등은 자고이래 계속 다루어졌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또 길게 글을 쓰는 건 너무 진부하고, 작품 내에서 다루어지는 넓이 역시 제가 아는 한 과거에 충분히 다루어진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딱히 신선한 부분도 없습니다.
종이인간(?)인 요리토 역시 일단 설정 자체는 '야화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의 추억으로부터 비롯된 인간'으로 꽤 특이하게 생각되지만, 뚜껑을 열고 보면 이 역시 그냥 평범한 소재입니다. 물론 여기서부터 좀 더 어떠한 고찰이 진행되었다면 새로운 특이함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설정이 요리토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잠시 고민하는 것 정도로만 표현되고 말기 때문에 큰 진행 없이 마무리되었다고 보입니다. 결국 작품의 소재 자체는 새로운 편이나, 그 소재로 인한 줄거리 진행은 지극히 상투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시즈키 마나와 코요리의 비중은 적당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둘은 작품 내의 주요 줄거리 전개에는 전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캐릭터였지요. 마나의 경우 요리토의 존재 상실로 인한 슬픔을 극대화시켜 주기 위해 등장한 캐릭터이고, 코요리의 경우는 아오노의 겉과는 다른 따스한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캐릭터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상당히 풍부한 개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내에서 상당히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타케시와 마유코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둘의 등장 이유는 마츠리의 최종 행동을 결심시키고 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도 가진 개성에 비해 줄거리 내의 비중은 작은 편입니다. 이 각각의 인물들은 만약 다른 원작이 있었다면 많은 팬을 가질 수 있는 강한 개성이 있다고 생각되는데(특히 게임의 경우 진행을 통해 나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 덕분에 이 캐릭터들도 주인공의 위치에 오게 될 수 있죠), 그랬다면 과연 제작자들이 작품에서 이렇게 형편없는 비중(…)을 차지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되네요.
작중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 중 하나는, 모리미야 아오노가 인간이 되고 난 후의 모습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그린 작품 후반부입니다. 후반부는 아오노의 힘으로 만들어낸 종이인간 요리토가 없어지고 마츠리의 생명으로 인간이 된 지 대략 일 년 정도가 흐른 뒤로 보입니다. 그전까지 아오노의 요리토에 대한 집착과 애정으로 볼 때, 일 년도 지나지 않은 그 시점에서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예전 요리토를 아는 사람들(물론 그들은 전에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아오노나 요리토, 마츠리의 일은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는 합니다만)을 만나고 다니는 모습은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비극을 겪은 입장에서 그를 다시 떠올릴 수도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일 수도 있는데, 그는 매우 평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아픈 기억에 직면할 수도 있는 행동을 평온하게 행하는 아오노의 행동에서부터, 그가 '만들어낸' 요리토와의 행복한 생활이 원래 그의 꿈에서부터 비롯된 가상의 것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친동생이 죽었을 때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던 그가 이번에는 이렇게 평온한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일 년 전 있었던 요리토와의 일은 그가 바라는 모습을 스스로 창조해 낸, 일종의 꿈과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되네요. 사랑하는 동생이 한번 죽었을 때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을 텐데, 사실상 두 번째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던 사건을 저렇게 담담하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13화 끝부분에는 마츠리가 즐겨 마시던 토마토 단팥죽(어떻게 생각해도 마시고 싶어지지 않는 이름입니다. 절대로 -_-;;;) 캔이 두 개 놓여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줄거리 상 마츠리는 죽고, 요리토는 소멸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면(사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긴 합니다.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결이 워낙 깔끔하게 되어있어서……) 이 장면의 암시로부터 저 둘이 사실 살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되리라고 생각되네요. 물론 저 둘을 다시 살리는 것은 줄거리 상으로는 무리가 많고, 아마 여러 부분에서 왜곡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캔은 실제로는 몇백 년 전에 끝났어야 할 세 명의 추억이 왜곡된 형태로 이어져 내려오다 이제야 그 왜곡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그 아름답고 치열했던 추억의 종결을 선언하는 소품이다. 이제 그것을 뒤로한 채 나아가는 모리미야 아오노에게는 과거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이제 더 이상 현재 진행으로 남겨둘 수 없는, 확실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라고 해석을 하는 편이 차라리 줄거리에 더욱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왠지 자꾸 상징물로써의 캔이 아닌, 실제 두 명이 살아있었다는 증거로서의 캔을 바라게 되네요 ^^;;
4. 총평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인물 간의 갈등을 13화 내에서 훌륭하게 완결지은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짧은 분량에 비해 벌여놓은 인물 간의 갈등 관계가 많았는데, 문제없이 이를 모두 정리한 것이 이 작품의 제일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네요. 독특하지만 이해가 가능한 작품 배경 설정은 청자의 빠른 이해를 돕게 된다는 점에서 장점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전체적인 분위기(줄거리, 인물 설정 및 작화까지)는 에로게 원작 또는 NT노벨 원작의 다른 애니메이션과 굉장히 흡사하나, 이 작품 자체가 주위 다른 어떠한 것과도 연관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완결된 작품의 구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이게 장점이 될 정도로 지금 나오는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애니메이션들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요. 기분이 좋지만은 않네요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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