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사회계약,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1. 서론
인간 사회에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 질서 유지가 힘들게 되죠.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회 질서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사회 제도가 구성원들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사용되는 비용 이외로 자기 방어를 위한 추가적인 물적, 심적 지출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가 되니 자원의 낭비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 구성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 자체가 사라지고(주위의 인간들이 동료가 아니라 모두 적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 사회를 떠나서 적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는 게 낫잖아요), 미래를 위한 자원의 축적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삶의 질을 개선할 수도 없게 되겠죠. 비를 피할 수 있는 집, 겨울에 먹기 위해 저장해 두는 식량 등의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미래의 변화화는 환경에 적응·제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지식의 습득·발전·전수도 불가능하겠고, 무엇보다 임신 기간만 10개월이고 스스로 살아가는 데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한 인간의 후손 생산이 굉장히 어려워질 겁니다.
물론 '강제로 법을 지키게 하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자기 좋은 대로만 행동할 거야'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전통적인 동·서양의 성악설, 성무성악설뿐 아니라 최근 신다윈주의의 주장을 볼 때마다 '혹시 이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씨의 '이기적 유전자'나 최정규씨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저에게 인간관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어 주었었죠 ^^;;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새는 것 같지만, 인간관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잠시 언급하고 본 주제로 다시 들어가 보도록 해야겠네요.
2. 인간관
인간관에 대한 저의 전제 중 첫 번째는 것은 인간은 특이한 존재가 아닌, 동물의 일종이다라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고 '진화의 정점'에 서 있으며 '선택받은 종족'이라고 말하기에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신체적 구조가 그다지 뛰어난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뇌 부분의 신체적 구조는 확실히 축복을 받았지만, 기타 다른 부위는 다른 포유류들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뛰어난 기관이 없잖아요. 게다가 신체의 기본 구조와 구성 법칙 자체도 큰 범위에서는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맹자(孟子)의 말씀대로 인간과 금수는 본질적(신체적)인 부분은 같고, 약간의 차이(생각하는 것)가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애초에 길게 쓰지 말고 이 한마디만 인용하는 게 편할 뻔했습니다 -_-a
그러면 이렇게 다른 동물과 큰 차이가 없는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겠죠. 짐승도 천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면요. 저는 저 약간의 차이인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이 인간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경험에 근거한 맹자의 사단(四端)과 같은 설명에서부터 주자(朱子)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과 같은 치밀한 이론적 설명 등 예전부터 있어왔던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그 훌륭한 근거가 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세한 설명은…… 으음 인터넷에 많아요 ㅋ 저거 다 쓰려면 너무 글이 길어지니까 궁금하신 분은 간단히 찾아봐 주셔요.
그런데 새로운 진화론에 근거한 '이기적 유전자'나 게임이론에 근거한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보고 나니 이와 같은 기존의 생각에 회의가 들더라고요. 유전자의 번식이라는 목적이 인간 행동의 제일 기본적인 동인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하게 되는 효율적인 전략이 바로 이타적인 행동이라는 분석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선하다'와 '악하다'는 '이타적이다'와 '이기적이다'라는 말과는 다른 기준에 서 있는 말입니다.(이 말을 쓰고 나니 고등학교 때 성선설에 맹자와 루소를 묶고, 성악설에 순자와 홉스를 묶어 가르쳐버리는 엄청난 오류를 범한 윤리 교과서가 생각나네요. 이제는 개정되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분석을 보고 있자면 굳이 칸트의 정언명령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라는 점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생깁니다. '자신의 번식을 위해 이득이 되는 행동인 선한 행동을 한다'라는 말 자체를 직관적으로 보아도 '인간은 선하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잖아요.
사실 위의 말을 살짝 바꾸면 '인간은 본능에 의해서부터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 선한 행동이 악한 행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존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결국 자연선택적으로 선한 인간이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고, 결국 본능의 근본인 유전자에서부터 인간은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인 이(理)가 '사물의 원리, 우주의 질서'와 같은 거창한 것에서부터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다소 조그맣고 다급해 보이는 것으로 치환될 뿐, 인간이 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네요. 무언가 납득은 되는데 기분은 살짝 상합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제게 '너는 현대사회의 첨단을 달리는 학문을 전공하는구나'라고 하는 것과 '너는 자본주의 사회구조 유지를 위한 학문의 주구일 뿐이야'라고 하는 것은 사실 둘 다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말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저러한 주장들은 '인간은 스스로를 사랑하게 만들어져 있다'라는 전제로도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하지 못한다(혹은 자신이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은 결국 긍정적인 자기애가 발현되는 모습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긍정적인 자기애는 자아에 대한 확신과 윤리적인 인간관계의 단초가 되니 이도 훌륭한 천재가 나와서 아름답게 다듬으면 심금을 울릴 성선설의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연결시켜 설명하던 과거의 이론보다는 무언가 '격'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네요. 역시 요즘 사람들은 낭만이 부족합니다. -_-;;;;
3. 인간다움
어쨌든 위와 같이 선한 인간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사회에 강제 규범이 없어도 무조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동물의 생존 목적 중 큰 부분이 바로 종족 번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연환경이 좋지 않을 경우 자신의 새끼를 잡아먹어버리는 것과 같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발현하기에 환경, 자원적인 문제가 큰 제약을 가져오는 경우 이 본성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사실 동물이 자신의 새끼를 잡아먹는 것은 현재의 악조건에서 무조건 후손을 남기는 것보다 생존능력이 뛰어난 자신의 육체를 우선적으로 보존하여 이 악조건을 넘겨 좋은 환경을 만나 다시 번식을 시도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어느 경우에도 동물의 일차적 조건인 종족 번식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선한 본성을 발휘하기에 환경이 좋지 않을 경우 추후 좋은 환경을 기다리며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행동에서 일탈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주변 환경을 크게 바꿀 수 있는 능력도 있기 때문에 이 행동의 왜곡이 더욱 커질 수도 있겠고요.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합니다. 논리적인 구조가 아닌 비유의 구조이기 때문에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지만, 치밀하게 전개하기에는 아직 공부가 부족하네요.)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인간은 상호 간에 규범을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 사회가 구성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자원의 확보와 안전에 있어 우위에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이겠지요. 유물론적 변증법의 입장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자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그 규범의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고대 중국의 지배계급 사이에는 예(禮)라는 도덕규범의 형식이 있었고, 유럽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은 한 사회의 지배계급 간의 규범은 전통과 관습에 기초를 둔, 자율적이고 내면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반면 사회 구조상 피지배계층의 규범은 법(法, law)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주로 타율적이고 외부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물론 사회 전체의 금기(taboo) 또는 향촌자치적인 규범도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따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어지니 무리이겠지요. 사회 전체를 크게 보아 저런 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지배계층 쪽이 상대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환경에 따른 인성의 훼손을 적게 당하고, 나아가 계속 축적되어 오던 인류의 지식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착취와 비착취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은 피착취 계급뿐 아니라 착취계급 역시 정신적으로 병들어있다는 일리 있는 이론도 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만 늘어놓는 글이기 때문에 이것도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간단히 쓰고자 한 글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져서 힘드네요 -_-;)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배계급이 '선택받은 인간'들이라 그 천성에 따라 좀 더 자율적이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피지배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정신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정을 잘 보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공자께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해야 예를 안다(衣食足而知禮)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죠. 그러므로 서양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는 인류 전체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들 자체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에 비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배경이 만들어졌으니까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본격적으로 현실에 적용된 때도 이때부터입니다. 사실 인권 개념이 보편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이유와 인성 보존과의 관계가 유의미한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짐승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올바른 성정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확실하고, 산업혁명과 관계없는 동양의 윤리 구조에서도 개인윤리가 사회윤리의 기초가 된다고 본 점(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비추었을 때 개인의 심성을 바르게 닦을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갖추어지는 것에서부터 '인간다운' 인류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4. 규범
처음에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존능력을 높이기 위해 구성한 인간 사회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 인간의 왜곡된 본성을 본래대로 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람 간의 규범 역시 그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인권의 존재를 바탕으로 사회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소수의 지배계급이 창출해 낸 사회 규범은 이제 인권에 바탕한 국민주권에 의해 창출(되는 것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말이 길어졌는데, 사회계약론 이야기입니다 -_-;; 잠시 여담이지만, 선현들의 이론이 있다는 것은 정말 편한 일인 것 같습니다. 복잡하게 생각을 나열할 필요 없이 이미 잘 세워진 논리 체계를 그대로 빌려오면 되니까요. 참고로 여기서 이야기되는 사회계약론은 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것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뭐,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루소의 이론이 나올 수밖에 없죠 ㅋ
사실 선한 인간의 본성을 발현하는 데 사회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가 추구하는 공동선의 개념이 이해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의지인 일반의지는 도덕적인 의지의 표현이고,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공동선이 곧 본성의 발현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이쯤 오면 이제 '그럼 그 완벽한 목표처럼 말하는 선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나올 만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플라톤이나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이 아니라 '~가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도 없고 추측해 보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 본성의 회복을 꿈꾸는 사회라면, 각 공민의 의지가 모여서 만들어진 일반의지가 추구하는 방향이 현실보다 좀 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중우정치의 문제나 다수결의 폐단과 같은 점을 지적하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루소의 일반의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오류가 없다고 정의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지리라고 생각되네요. 우선 다수 의견의 강요에 의한 폐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사회 전체적으로 충분한 의견 교류와 토론이 이루어진 상태라면 저런 문제는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소 역시 그런 면에서 직접민주제를 주장했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과거에는 동성연애를 정신병으로 취급했는데 오늘날에는 성적 소수자로서의 선택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 있겠네요. 만약 중우정치의 논리대로라면 동성연애자가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 동성연애가 이렇게 기호로써 인정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성연애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검토가 있고 난 후 현재는 이것이 소수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의견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과정까지 도달한 상태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여러 다수의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인성을 가진 이성적인 사회 구성원이 확보되면 이와 같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과, 합리적인 방향으로의 사회 여론 조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공동선이 결정되는 과정이 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로,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의 무오류성에 대해서는 약간 이견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어떠한 사회던 해당 사회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민 전체가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환경오염이 가져다주는 심각한 피해를 미처 예측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산업폐기물을 그냥 버리는 것이 공동선이라고 생각되었었겠지만, 추후 그것이 더욱 큰 피해를 가져오는 것으로 공동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제는 환경오염 규제를 하는 것이 공동의 이익에 더욱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겠네요. 따라서 일반의지의 무오류는 '해당 시대에만'이라면 긍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 항상 보편타당하게 옳은 이데아와 같은 절대선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라면 적어도 당대에 옳다고 생각되고, 실제로 현 상황보다 옳음에 가깝다고 추측되는 저것에 기준을 두어 사회를 움직여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소수의 사상만이 절대선이라고 믿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오류를 범할 확률이 현저히 낮을 테니까요.
5. 법이념
따라서 이와 같은 이론에 의해 구성된 사회라면 당연히 공민들의 일반의지가 모든 규범의 상위에 위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현대의 국가에서 모든 규범의 상위 체계로 존재하는 것은 헌법입니다. 실제로 사전에서 헌법이라는 단어는 '국가 통치 체제의 기초에 관한 각종 근본 법규의 총체'이자 '자유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치 기구 특히 입법 조직에 대한 참가의 형식 또는 기준을 규정한 근대 국가의 근본법'이라고 규정되고 있습니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여기서 나오는 자유주의 원리란 위에서 길게 언급했던 인권과 사회계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헌법은 해당 국가 안의 공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공민들의 일반의지를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이념에서 정의가 성립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 헌법을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법률이 제정되고, 차례로 명령, 조례, 규칙 등의 세부적인 하위법이 제정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위법은 상위법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목적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수단을 지속시키는 것은 당연히 부조리한 것이니 당연한 이야기이겠지요. 이것은 법이념에서 합목적성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헌법을 구성하는 공민의 일반의지는 항구적인 가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이상과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법 자체의 안정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명확하지 않고 변화하는 이상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법이 바뀐다면 인간사회의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에 이러한 법적 안정성은 분명 법이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이 훨씬 자세하게 서술하여 주신 법이념을 이 글에서 어설프게나마 또 언급하는 이유는, 법이 왜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 목적이 아닙니다. 법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구성원의 공동선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법이 지향하여야 할 기초 목적이고, 다른 목적은 이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의 필요조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법이념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법이념이 존재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기본 정신일 뿐입니다.
6. 마무리 - 직접민주주의를 꿈꾸며
우선 이제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선합니다. 하지만 현실상의 문제에 의해 그 본성이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본래의 선한 본성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하여 사회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사회는 최소한의 생존권만을 불완전하게 보장해 주었었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며 인류사회는 더 많은 구성원들에게 본래의 선함을 실현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바탕을 둔 근·현대의 국가가 생겨났으며, 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헌법을 필두로 한 사회 규칙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회가 변화하는 방향은 이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인간의 본성을 더욱 온전하게 발휘해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달성 가능하다고 생각되네요. 사실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 누구에게도 양보될 수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인간의 권리'임을 생각해 볼 때, 현재의 대의민주제보다 직접민주제가 훨씬 더 이상에 가까운 제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근대국가이론이 등장했을 때부터 주장되어 오던 이론이죠.
하지만 과거부터 직접민주제가 실행되지 못했던 이유로는 직접민주제 시행 시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 사회 추진력의 고갈, 다수의 횡포 등의 지엽적인 것도 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어리석다'라는 현실 때문에 예상되는 중우정치의 공포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현 사회가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직접민주제는 실행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해 이익입니다. 높은 절벽을 등반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현실상 등반자가 암벽등반에 전혀 숙달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면 생명을 위해 안전한 훈련장 또는 실내 암벽등반장에서 등반 연습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등반 연습의 목적 자체가 암벽등반이고, 이제 등반자가 충분히 기술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면 실내 암벽등반장을 나와 목표가 되는 암벽에 등반을 시작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살펴보았을 때 이제 실내등반장에서 뛰쳐나와 본격적인 실전 등반을 준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 정부가 출범하고 국민과의 의사소통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켜오다 소고기 수입 사태를 계기로 이 불협화음이 드디어 거리로 분출되고, 이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해져 갑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직접민주주의의 비용을 크게 절감시켜 줄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그에 대한 토론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감소시켜 주는 안전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 이야기되고 있는 집단지성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일반의지가 현실상에서 구현된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게다가 토론하는 사람들의 수준 역시 굉장히 높습니다. 분명 그중에는 자신의 의견만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이나, 남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 단지 남의 의견을 부정하기만 하는 사람 등 부정적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호한 진실이 제시되었을 때 사람들의 감정에 잘 호소하는 쪽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고요. 게다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역사적 문제로 인해 좀 더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전체적인 인터넷 여론의 형성을 살펴보았을 때 '큰 강에서 잠시 역류하는 하천'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과 그것의 토론을 통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의견 개진을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촛불집회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의 모든 여론 형성에 있어서 해당된다고 보입니다. (물론 최근의 시점이 촛불집회에만 맞추어져 있어서 그쪽 의견이 주류이기는 하지만요) 이것은 단순한 중우정치가 아닙니다. 단지 찬성하는 사람이 많으니 우리 의견이 옳다가 아니라, 이쪽의 의견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저쪽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방향으로 여론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민주주의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나 유가의 정치철학 쪽에 더욱 많은 공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절대 진리라는 것을 현실상에서 찾기는 너무 어렵네요. 저의 능력 부족이 제일 큰 이유이겠지만, 어쩌면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제가 사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발견하지 못하면 실질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죠. 하지만 절대치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절대적인 것에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의지에 근거한 직접민주제야말로 그 절대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제일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보다 수많은 사람의 선택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요.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수많은 사람'의 능력이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보다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동안 직접민주제의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 역시 비록 위에 직접민주제가 시행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쓰기는 했지만 아직 그 환경이 완벽하게 조성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 대의민주제에 대한 부작용이 표출되고 있고, 직접민주제를 시행할 기반환경의 조성도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당장 직접민주제가 시행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제 좀 더 이상에 가까운 사회를 위해 직접민주제의 요소를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서부터 그 출발을 시작해 볼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펜 안에서 호투를 펼치는 투수라도 실전 경기의 경험을 쌓지 않으면 영원한 불펜투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직접민주제의 가능성이 보이는 지금의 현실에서 직접민주제적 요소를 도입하여 사회 제도의 전환에 도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대의제로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현실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단지 기존의 제도를 수호하려는 것보다 점진적이나마 이상 실현을 위해 제도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법의 이념에도 부합된다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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