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에 대한 생각


  어머니와 통화를 했습니다. 오늘 점을 보고 오셨다네요. 예전에도 간단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점괘를 그다지 신뢰하지도 않지만 미신이라고 부정하지도 않아요. 간단히 말하자면,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굳이 찾아서 듣지는 않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하튼 어머니께서 그 점쟁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맞는 거 같더라 하시며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자니 신기하기는 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집 스토커도 아닌데, 오 이거 신기하네' 이러면서요 -_-a 

  그런데 전화통화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해 주신 점쟁이의 말을 생각해 보니, '말에는 힘이 있다.'라는 말이 생각났었습니다. 옛날부터 흔히 언령(言靈)이라고도 말하기도 했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사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나 새해에 덕담을 주고받는 관습 등에서 자주 드러나는 이 언령의 개념은, 단순히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던 샤머니즘의 연장선이나 '말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사회·문화적 이유 이상의 뜻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이란 것은 의사 전달과 표현의 도구 이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제 생각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 한 이야기입니다 ㅇ_ㅇ) 현실에서 불확실하고 연속적인 상황이나 생각들을 말은 확실하게 규정지어 정의해 주잖아요. 그러한 정의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동시에 우리의 사고가 그 사물을 규정시키는 '말'이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후 11시 39분'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통해서만 '시간'이라는 연속적인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이 말이에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법인(三法印)의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보이듯이, 사실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사물을 말로 정의하는 순간 내가 정의한 사물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우리가 사물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시간 동안 인간의 오성으로 변화 정도가 거의 파악되지 않는 사물을 함부로 고정시켜 명명하는 것이겠죠. 뭐, 어떤 경우에도 말이란 것이 만물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주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은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동시에, 말의 의미에 규정되지 않은 사물의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사물은 이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어떤 어떤 특징이 있구나'라고 하는 순간 그 사물이 지닐 수도 있는 다른 가능성은 일단 잊히게 되죠. 나중에 그 가능성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 사물에 하나의 해당되는 이름이 추가로 붙을 뿐, 또 다른 수많은 가능성들은 계속 잊히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추상적인 존재일수록 이러한 말의 위력이 더욱 강력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추상적인 존재하면 흔히 생각나는 절대자와 같은 존재보다, 일상적으로 흔히 접하게 되는 사람의 기분, 생각, 느낌 같은 것이 이러한 위력에 더욱 크게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이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경우 내가 그 이성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고 있어도, 남이 내게 '그 사람 어떤 거 같아?'라고 물어보거나 스스로 그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되면 언어로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이 정의되어 버리고, 그 정의된 감정은 감정의 다른 가능성을 밀어내고 나의 주된 감정으로 자리 잡아 버립니다.

  특히 사람은 자신의 일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계속 변화가 일어나 사실상 고정된 실체가 없는 세상에서, 일관성은 과거와 미래의 존재를 추측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관성은 변화하는 존재의 어렴풋한 틀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필수적인 조건이 되죠. 여기서부터 개인적으로는 개성, 자아, 아집 등을 이끌어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제도, 법률, 문화, 자연법칙 등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일관성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만약 나의 생각을 특정 형태로 규정지어 버리면, 그 순간부터 웬만한 반례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을 바꾸지 않죠.

  게다가 인간 사회에서 일관성에 대한 중요함은 잘 알려져 있으니,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나는 일관성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게 되지요. 이성적인 면이나 감성적인 면 모두에 있어서요. 생각해 보세요. 어제는 내가 좋다고 하고, 오늘은 다른 사람이 좋지 나는 싫다고 하다가 다음 날은 나와 다른 사람이 둘 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과 사랑을 할 수 있겠어요? 요즘 우리 대통령 각하가 맨날 밥먹듯이 욕을 먹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도 사회 제도의 일관성으로 신뢰를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할 대표가 맨날 이랬다 저랬다 말이 바뀌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그 변화 수준이 빛이나 촉각 등의 자극이 가해지면 오그라들었다 자극이 사라지면 다시 펴지는 달팽이 눈과 같이 매우 근시안적이라 그 정도가 더하죠. 세상에 집회 참가자 많을 때는 반성했다고 하다가 참가자가 줄어드니까 법질서 확립 차원의 엄단이 필요하다고 강경 진압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나서서 사람들이 다시 늘어나니까 또 순수한 촛불집회는 보장해 준다는 일관성 없는 비겁한 작태가 어디 있습니까. 마치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자극 - 반응'에 대한 실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으음 맨날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새네요 -_-;;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이 일관성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때문에 불확실한 형태를 확실한 형태로 규정하는 말을 타인에게 발설했을 경우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규정하는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나는 쟤가 싫어'라고 말하는 순간 마음속에서도 '아 나는 그 아이를 싫어했구나'라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나는 저 아이가 싫다고 말했으니 웬만한 반례가 나오지 않는 이상 사회적으로는 저 아이를 싫어하는 위치에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겠지요. 따라서 말은 생각 이상으로 자신에게 있어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게 되겠죠. 딱히 신비적인 존재로서의 언령이 없다고 해도, 언령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말의 구속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이 사는 친구는 집에 가고, 혼자 어두운 방 안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나 보니 간단하게 시작했었던 생각이 의외로 길어졌네요. 뭐 제가 그렇죠 -_-;;;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