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저는 녹차를 매우 좋아합니다. 고등학교 때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서 커피를 마실 때, 커피가 싫었기 때문에 녹차를 마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밍밍하고 떫은 녹차의 맛이 좋아져 버렸네요. 요즘에야 커피를 잘 마시기는 합니다만, 일 년 반 전까지만 해도 커피를 많이 싫어했었거든요.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라 그런 건 아닙니다(그렇다면 녹차도 마시지 못했겠죠 ㅋ). 감히 원래는 쓰기만 한 주제에 설탕과 시럽의 도움을 받아 달달한 척하는 그 위선적인 맛이 싫었다고나 할까요 -_-;; 아, 물론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마시다 보니 커피도 매력이 있더라고요.
여하튼 처음에는 단지 커피의 대체재(?)로 선택한 녹차였기 때문에, 별 맛도 모르고 마셔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냥 목마르고 뭔가 따뜻한 게 마시고 싶기는 한데 마실만한 물건은 없을 때, 현미녹차 팩 하나 뜯어서 뜨거운 물에 담가놓고 마시면 맹물보다는 괜찮네 정도였지요. 본격적으로 녹차의 매력에 빠졌던 것은 대학교에 들어와서입니다. 남들은 바쁘게 지내던 새내기 시절에 저는 이상하게 한가했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녹차 소비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마침 그때까지 주로 현미녹차를 애용했던 제게 선물로 잎차가 들어왔기 때문에 집에서 놀고 있던 일인용 찻잔을 하나 들고 와서, 등 뒤로 달빛을 받으며 우아하게 한쪽 다리를 책상에 올리고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하여 골밭의 정취를 몸 가득히 느끼며 녹차를 시음하고는 했습니다. 물론 왼손은 찻잔을 잡기보다 주로 F5 키 위에 있기는 했지만, 가끔 사냥터가 한가해질 때 F5키를 떠난 왼손으로 찻잔을 들어 녹차를 마시며 치열한 사냥터에서의 여유를 찾곤 했지요.
그러했던 저의 차력(茶歷)에 일대 변환점이 일어난 것은 2학년이 되어서였습니다. 부모님의 지인 분께서 부모님께 주신 차 선물을 제가 쏠랑 스틸(…)해온 덕분에 녹차의 종류가 크게 늘어났고, 같이 기숙사에서 살던 친구의 부모님께서 5인 다기를 선물로 주시는 바람에 갑자기 기숙사 방에서는 때 아닌 녹차파티가 일어나게 되었거든요. 그 무렵에서야 녹차를 제대로 우리면 많이 떫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_-;; 훗날 그 5인 다기의 찻잔은 차를 담기보다 주로 소주를 많이 담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남기고 말았지만, 그 시기가 본격적으로 숙우를 이용하여 물 온도를 조절해 가며 나름 다도를 갖추어 차를 마시게 되었던 출발점인 것도 사실이었죠. 하지만 이 윤택한 생활도 잠시, 다기를 선물해 준 그 부모님의 아들놈인 제 친구가 찻잔이라는 이름의 소주잔을 하나하나 깨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다기가 이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줄은 그 부모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놈이 찻잔 두 개를 해 먹고, 다른 놈들이 추가로 두 개 더 말아먹고, 아직까지 범인을 모르는 숙우 파손 사건이 일어났죠. 그리고 대망의 기숙사 퇴사날, 이삿짐을 싸는 도중 제가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있던 다관 손잡이를 해 먹는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의 녹차 인생은 심한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제대로 된 다기를 맞이하여 정신줄을 놓고 있던 틈에 예전에 쓰던 그나마 제대로 된 일인용 다기가 어디론가 가출해 버렸더라고요 ┒- 게다가 제가 그 무렵 녹차보다 알코올 도수 19.9%로 순해진 참이슬양의 깊은 맛에 빠져버렸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슬양과의 데이트 비용 과다지출로 인해 새로운 다기 구입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뭐, 못하고 있었다기보다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했다는 것이 더 맞겠지만요 -_-;;; 그렇게 장기간에 걸친 이슬양과의 만남으로 인해 제 몸이 피폐해져 있을 때쯤, 어머니께서 우연히 다기 하나를 구해오시게 되었습니다. 우체국에서 어떤 분이 실수로 어머니 계좌로 거금을 이체하셨는데, 그걸 별 말없이 원래 주인께 돌려드리니 우체국에서 감사하다며 다기를 하나 주었거든요. 아무래도 자기 돈도 아닌데 그런 걸 가지고 진상 떠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았나 봅니다. 여하튼 그 덕분에 다시 차를 마시는 생활로 복귀… 따위는 바로 하지 않았죠. 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이슬양이 너무 좋았거든요 -_-;; 으음 이제는 주도(酒道)의 꿈을 버리기는 했지만, 아직 그때까지만 해도 득도의 가능성을 쳐다보며 열심히 음주에 매진했었기 때문이죠.
결국 본격적으로 녹차를 다시 마시게 된 건 다시 대학교에 돌아와서부터였습니다. 학업과 음주를 병행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 버렸더라고요. 그리고 마침 그때 증제차가 아닌 덖음차가 제 손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찻잎의 질에 따른 녹차 맛의 차이점을 느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증제차 쪽을 좀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덖음차도 버리기 힘든 맛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굉장히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질 입맛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우전이나 세작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게 또 비싸면 비싼 만큼 맛이 더 부드럽더라고요. 어쩌면 플라시보 효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덕분에 차 구입비용이 크게 올라버렸습니다. -_-;; 왜 요즘은 부모님 지인분들이 녹차 선물을 안 하실까 하는 아쉬움이 팍팍 들곤 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굳이 다도를 지키면서 녹차를 마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에서 그 이상의 무엇을 찾으시려는 분이라면 다르시겠지만, 저는 단지 기호품으로써 녹차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스타벅스 같은 체인점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 때 딱히 별나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듯이, 녹차 역시 그냥 입이 심심할 때 간단히 끓여 마시면 되는 것 아닐까요. 아, 물론 녹차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고 순서를 지켜 끓이다 보면 뭔가 다도와 비슷한 순서는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맛 좋은 녹차를 만들기 위한 조리법을 지키는 쪽으로의 의미이지, 다도를 지킨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올 초 다시 다기를 살 때, 차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근본 없는 저는 뭔가 더 이뻐 보이는 유리 다관을 사고 말았습니다. 저 위에 있는 그릇이죠. 단돈 3만원에 저 정도 디자인이면 대만족입니다. 사실 저번에도 언급하기는 했습니다만, 요즘 화차나 허브차, 홍차 쪽에도 서서히 눈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 다용도 다기를 찾다 보니 유리 다기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글에서 계속 녹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면서, 캐모마일 차를 담은 사진을 올려놓았군요 -_-a 사진으로는 좀 작아 보이기도 하는데, 저기 가득히 차를 우리면 양이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으니 혼자 쓰기에는 괜찮은 크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흘러와 버렸네요. 즐거웠던 예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는 일인 듯합니다. 과거의 추억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바람에 비록 글은 빨리 쓰지 못하더라도 말이죠. 그럼 이제 이 즐거운 기분으로 마저 사뿐하게 글의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1. 녹차 맛있어요.
2. 이제 술은 많이 안 마셔요.
3. 유리 다기 이뻐요.
역시 이런 주제 없는 개인 글의 마무리는 세줄 요약이 예의입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