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가득한 푸딩 만들기 이야기


  자취생활을 한 지 일 년이 넘어가면서, 제가 은근히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이 바로 요리입니다. 맨날 밖에서 먹기도 질리고, 극도로 심심할 때 그냥 만들면 은근히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뒷정리는 엄청나게 싫어해서 설거지거리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만, 일단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할 때는 꽤 재미를 느낄 수 있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요리를 잘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도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면 어머니께서 식탁에 차려두신 음식을 탐욕스럽게 먹어오는 생활을 압도적으로 많이 했으니까요 -_-;; 남자치고 상대적으로 까탈스러운 입맛을 이용해 음식의 간을 맞춰, 그럭저럭 먹을만한 소금국을 만드는 정도라고 하면 저의 음식실력을 가늠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리쥬님의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푸딩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음식 관련 글을 보면 '오 이렇게 만드는구나. 그런데 재료 중 이게 없고 이것도 없고 에이 못 만들겠네.'로 글을 읽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에도 별 다른 생각 없이 죽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재료 : 달걀, 우유, 연유 - 조리방법 : 중탕가능'


…… 이거 재료가 간단하잖아!

이건 나 같은 자취생을 위한 푸딩 제조 방법임에 틀림없어!


  푸딩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가끔 쓸데없이 타올랐다 스스로 죽어버리는 요리사의 혼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또 깨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뭐 어때. 일단 만들어버리고 맛없으면 같이 사는 친구 주면 되지.'라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푸딩을 만들어 보기로 갑작스레 결정을 내려버렸어요. 그리고 마침 떨어진 달걀을 미끼로 저녁식사 후 친구를 마트에 유인하였습니다.


친구 : 야, 뭐뭐 사야 되냐?

본인 : 음… 일단 계란이랑, 냄비받침이랑… 연유

친구 : ???? 연유는 어디다 쓸라고 -_-

본인 : 내가 푸딩 만들어줄께

친구 : 너 푸딩 만들 줄 아냐? -_-;;;;;;

본인 : 아니, 모르지. 근데 다른 분 블로그에서 레시피를 봤어. 간단하더라고. 만들 수 있을 거야, 아마.

친구 : 야……………

본인 : 한번 믿어보셈. 그렇고 일단 만들면 먹을만할 거에염. 저번 수제비도 그랬잖아염.


  확신에 가득 찬 저의 호언장담에 친구는 별 말을 하지 않고 연유를 찾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아마 몇 달 전에 성공했던 수제비와 최근 성공했던 이상한 짜장면의 도움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일단 일을 저질러버리고 보면 그럭저럭 먹을만한 결과물이 나왔었거든요 -_-;;;; 그래서 신나게 재료를 사 들고 집에 복귀했습니다. 푸딩을 떠먹을 디저트용 스푼까지 새로 사 들고 말이죠.


  집에 복귀해서 재료를 앞에 두고 과학적인 추론을 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액체상태인 재료들이 콜로이드 젤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은 분명 고온에 의한 단백질의 응고 과정 때문이야. 그런데 물 분자가 많으면 이 응고상태가 약해질 우려가 있어. 나는 중탕을 할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 물 분자가 나가는 양이 적겠지. 그렇다면 달걀을 많이 넣어 점성을 높일 필요가 있어. 이거 김전일이 따로 없군.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때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었습니다. 그렇게 재료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놓고 보니, 중탕할 그릇이 없다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푸딩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고 있던 친구를 '이탈리아식 밀크 푸딩이래'라는 말로 달래주면서 그릇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본인 : 야

친구 : 응

본인 : 사기그릇은 안 되겠고… 유리컵에 중탕하면 컵 깨지겠지?

친구 : 아무래도 그렇겠지?


  …… 요리에 무지한 남자 둘이서 뭘 알겠습니까. 결국 '깨질 일도 없고, 열 전도율도 높은' 그릇을 찾은 결과, 스테인리스 사발이 푸딩을 담을 불운한 그릇으로 당첨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신나게 계란, 연유, 우유를 풀어버리고 휘휘 저어 대충 잘 섞어주었습니다. 물론 믹서기, 거품기 따위는 없었으므로 젓가락으로 말이죠 ┒-


친구 : 좀 많지 않어?

본인 : 그런가? 에이 괜찮아. 많이 만들고 두고두고 먹지 뭐.


  지나간 일이니 하는 말입니다만, 그릇이 너무 크고 재료 양이 많으면 안쪽의 푸딩은 굳지 않더군요 -_-;;; 뭐, 그때는 당연히 그릇 전체의 푸딩이 사뿐하게 굳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중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그릇을 꺼냈죠. (재료 양이나 그런 건 잘 안 지키지만 시간을 잘 지킵니다. 빨리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되잖아요 -_-;;)


친구 : 이거 다 안 굳었는데? 실패한 거 아냐?

본인 : …… 있어봐. 이거 식히라고 그랬거든. 냉장고에 넣으면 아마 식으면서 굳어질 거야.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릇이 너무 크면 안쪽 재료들은 굳지 않습니다. 급한 마음에 뜨거운 그릇을 바로 냉장고에 넣는 금기사항까지 시행해 버린 저는, 그래도 변하지 않는 가운데 액체 부분에 당혹감을 느꼈고, 심지어 냉동실에까지 그릇을 투입해 보았습니다만 결과는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가운데의 액체를 깔끔하게 따라버렸습니다 -_-;;; '안되면 버려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물론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물어보시면, 대답하기는 곤란합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완성!


푸딩 외관
모양이 약간 이상한 건 익지 않은 부분을 쏟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푸딩 완성 -_-;;;
  그리고 드디어 시식시간! 깨끗하게 씻은 새 디저트용 스푼을 사이좋게 들고 푸딩 시식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몰캉하게 떠지는 푸딩의 감촉이 스푼을 통해 느껴지면서, 저는 '아 놔 이렇게 또 하나 성공하는 건가. 아무래도 나 이쪽에 소질 있나 봐.' 등의 망상이 절로 생겨나더라고요. 그 상태로 한 숟갈 뜬 푸딩을 우아하게 입 안에 넣었습니다.

!!!
!!!!!!!
!!!!!!!!!!!!!!!!!

  뭐라고 할까…… 굉장히 미묘한 맛이었습니다. 한 숟갈 뜬 후 친구를 바라봤는데, 친구도 저를 바라보더라고요. 그리고 둘 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말로 수식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본인 : 어이
친구 : ……
본인 : …… 맛있냐?
친구 : ……
본인 : …… 아주 맛없지는 않지?
친구 : …… 어
본인 : 음…… 이거 참 미묘한 맛이네. 분명 맛이 없지는 않은데……
친구 : 응…… 맛없지는 않다……………

  친구야. 그때 배려 정말 고마웠어. 나도 사실 알고 있었어. 맛없다는 거……. 푸딩이라기보다 설탕 푼 계란찜 같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 알잖아, 나 입맛 까탈스러운 거. 미안해. 차마 그때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더라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너무 가혹했잖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엄청난 양의 푸딩(?)을 다 먹어치우기는 했습니다. 못 먹을 정도의 맛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친숙한 음식이잖아요, 계란찜은…

친구 : …… 이탈리아 실망인데?
본인 : 응?
친구 : 걔들 피자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그렇잖아.
본인 : 어
친구 : 그런데 이런 푸딩을 먹는단 말이야?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친구의 호감도가 -100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분들… 진심으로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무 죄도 없이 가만히 앉아 순식간에 저질 혓바닥을 가진 사람들로 매도되어 버리고 말았네요. 그리고 리쥬님께도 죄송해요. 뭐랄까… 저도 다른 분들처럼 '레시피대로 만들었더니 정말 맛있더라고요. 리쥬님 감사합니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포스팅을 하고 싶었어요. 오늘 리쥬님이 방명록에 남기신 글을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방 안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정도로 기죽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또 재도전을 했거든요. 사실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 조리법이 간단해서 아깝더라고요 -_-;;; 계란의 양을 크게 줄여서 두 번째로 만들어보니 이제는 나름 푸딩인 척하며 모양이 잡히네요. 맛도 달달하고요. 그런데 단맛을 단지 연유에 의존해서 그런지 뭐랄까…… 단맛이 너무 솔직합니다. 말 그대로 달기만 해서 너무 금방 질리게 되더라고요. 이 점은 리쥬님께서 새로 레시피를 보완하신다니 그걸 기다리거나, 캐러멜시럽을 새로 사 와서 풀던지 해야 할 듯하네요. 

  푸딩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이네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처음에는 실패하기도 했지만, 저 과정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오랜만에 이런 걸 만들어 보니 재미도 쏠쏠했고요.

  그나저나 캐러멜시럽을 사러 갈 때 친구를 무슨 말로 꼬셔야 할까요…….
  푸딩 카드는 이제 안 먹힐 텐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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