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역할에 대한 단상


  그저께 친구와 밤을 새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딱히 특정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별 잡다한 이야기가 다 나왔었죠. 그 많은 주제 중,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본 이야기의 큰 줄기는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이고, 그 중간에 딱히 난해한 부분도 없기 때문에 편하게 키보드를 두드려 나갈 수 있을 듯하네요.


  먼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사건은 작년 후반기쯤 친구가 들었던 수업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있는 네 개의 대학들이 '밀레니엄 포럼'이란 것을 개최했는데, 이 친구가 들었던 수업 중 하나에서 해당 포럼을 듣기로 해서 해당 수업의 학생들 및 교수님 모두가 참관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포럼에 참가한 K대학 총장님의 연설 내용을 들어보니 한번 생각해 볼거리로 꽤 재미있을듯하더군요.

  연설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친구와 친구가 들었던 해당 수업의 교수님이 쓴 글만 보았기 때문에 그 연설을 이곳에 자세히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옮겨보도록 하죠. 먼저 K대학 총장님은 K대가 교육과 연구에 있어 '품질개선'이 이루어졌다며 해당 대학의 성공사례를 소개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사례'라는 것이 모두 인프라와 이미지의 개선에 관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총장님은 K대가 지향하는 것은 '고용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대학교', '가장 질 좋은 상품(학생)을 생산해 내는 대학교'라고 말하셨다고 하네요. 이렇게 간단히 연설 내용을 줄여놓고 보니 너무 노골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나는 듯해서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우선 대학의 '품질개선'이 인프라의 발전으로 대변될 수 있는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인프라의 증가가 대학의 질을 개선시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자원이 많으면 그만큼 할 수 있는 일도 많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잖아요. 그리고 이러한 의견의 연장선상에서 국내 대학들의 재정확보를 위한 여러 노력들을 크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등록금을 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수업료가 물가인상폭의 몇 배 이상으로 오르는 것은 절대 반갑지 않은 일이고, 우리 대학이 이번에 기부금 전국 몇 위를 차지했으니 분발이 필요하다 등의 홍보자료를 볼 때면 낯이 뜨거워지기는 합니다 -_-;; 몇 년 전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새내기들의 학부모분들께 전화를 해서 기부금을 구걸하는 짓을 한 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국내 대학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학들이 위와 같은 추태를 부리는 '원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대학이 각종 방법으로 확보하는 자원(자본)의 양을 곧 대학의 발전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수준이 확보하는 자본의 양으로 대변될 수 있다는 주장은, 대학의 운영 목적이 기업과 같은 최대의 이윤 추구라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현대 사회에서 대학이 어떠한 존재 목적과 위치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적 이윤의 극대화가 대학의 목표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기에는 그동안 대학이 맡아 왔던 역할과 명성에 비추어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므로 우리 대학이 발전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얼마만큼의 건물을 지었고 예산을 얼마나 확보했나를 최우선으로 드는 건 상당히 천박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건물과 쉽게 비교가 가능한 수치로 표현되는 기부금 쪽이 인상적인 광고가 가능하기는 하겠지만요.

  게다가 저 '품질개선'이라는 용어는 참…… -_-;; 일 년 전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분명 뭔가 있어 보이는 용어를 고르려고 하다 보니 품질개선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테니 간단하게 넘어갑니다만, 저런 말을 쓴 김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ISO 인증도 받고 6 SIGMA도 도입하셨으면 좋겠네요. 하긴 남의 나라에 가서 자기는 대한민국의 CEO라는 연설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하며, 엄연히 다른 개념인 기업의 CEO와 국가의 행정수반을 비슷한 개념으로 헷갈려하시는 분도 계신데, 저 정도는 약과이겠군요. ㅉㅉㅉㅉ

  이제 위 연설의 두 번째 요지인, 대학의 지향점이 고용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 가장 좋은 상품으로써의 학생을 생산해 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중 두 번째로 나왔던 '상품으로써의 학생 생산'은 긴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수준 낮은 저질의 비유이기 때문에 먼저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생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저 발언은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괘씸한 짓거리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생은 대학의 교육 서비스를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하는 주 소비자입니다. 그런데 감히 서비스 제공자가 소비자를 상품 취급하다니요. 정상적인 시장이었다면 이런 서비스 공급자의 발언은 큰 파장을 불러왔을 겁니다. 사실 대학과 학생의 관계를 꼭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 발언은 천민자본주의적인 시각으로 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부러 살짝 비꼬아 봤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 내용인, 고용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이 과연 대학의 역할이냐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대학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다른 교육 기관과 경쟁을 해야 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저 발언은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대학의 소비자는 학생이고,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이라면 대학은 '수요자인 학생들의 필요에 의한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고용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졸업생을 배출해야만 하겠죠. 하지만 위 문장에서의 주체는 분명'학생'이 아니라 '고용주'입니다. 뭐, 대학을 다니면서 하루 이틀 새삼스레 보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대학 당국은 대학의 3대 주체 중 하나인 학생을 여전히 개무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을 위해 고용주의 선호를 맞춘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자본주의적으로 제대로 된 발언이겠죠?

  무엇보다 저렇게 고용주의 취향에 맞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건 대학이 아니라 기업의 연수원이죠. 위의 연설을 한 K대학 총장님 뿐 아니라 다른 대학의 총장님이나 교수님들 중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자주 하는 경우가 보이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공부도 그렇게 많이 하신 분들이 왜 그럴까요. 공부를 너무 많이 하면 간혹 미치는 경우가 있다던데,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네요. 아무렴 저런 머리 좋으신 분들이 대학과 기업의 연수원을 헷갈리시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만약 저게 제정신에서 나온 말이라면, 앞으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기업 연수원에서 기업 스스로 사용할 인적자원인 사원을 훈련시키는 건데 왜 해당 사원이 비용을 지불해야 하나요. 사회적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문제이고, 요즘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수익자 부담 원칙에 비춰보아도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역시 대강이나마 개요를 세워두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쓰는 글은 감정에 치우친 비난이 비중이 높군요 -_-a 그래도 잘못된 말은 아니니 삭제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면, 저 K대 총장님의 연설은 분명 대학을 사적 이윤 추구를 위한 기관으로 파악하고 있는 관점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자신을 '자본주의하의 교육 서비스 공급자'로 인식하는 주제에 '스승'과 '상아탑'의 탈을 쓰려고 하니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등록금을 낼 때의 학생들에게는 서비스 소비자의 자세를 강조하고, 학교 운영 참여와 같은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아시아적 사제관계를 강조하는 건 정말 파렴치한 짓이겠지요.

  그럼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에서 대학이 과연 어떠한 존재일까에 대한 정의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 그 수단으로 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아닌, 가치 전도가 되어 자본 획득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가치관의 실종 현상을 가리켜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르고는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대학 당국은 대학이 어떠한 곳인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무조건 자본의 논리만 좇으려는 정말 전형적인 천민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이는 대학의 존재 이유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즉 기본적인 철학의 실종 덕분에 나타나는 안타까운 현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은 그럼 어떠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어야 할까요. 고대의 아카데미(Academy)와 같은 순수 교육 기관으로서 존속해야 하는지, 기술 연구소로서 존재해야 하는지, 지식노동자의 훈련소일지, 문화교양의 중심지일지, 지식산업분야의 대표기업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역할을 복수로 할 수도 있겠고, 다른 역할이 있을 수도 있겠죠. (지금 생각나는 대로 쓴 것이라 분명 다른 역할도 많이 있을 겁니다 ^^;;)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생각해 본 양이나 공부한 양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힘드네요 -_-;;; 여하튼 현재의 대학 당국들은 대학 홍보와 예산 확보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과연 대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확실히 정해주었으면 좋겠네요. 많이 배우신 분들답게 훌륭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밀레니엄포럼에서 자기 대학이 지극히 천민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된다는 자랑을 할 시간에 조금이나마 이를 고민했다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은 저런 쪽팔린 행위는 하지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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