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코드기아스 R2 22화에 대한 생각


  몇 달 동안 한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코드기아스는 저에게도 주말드라마와 같은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방영되는 R2 이전부터 매주 꾸준히 보아 오고 있던 작품이지만, 그동안 이에 대해 별 말이 없었던 이유는 역시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서이죠 -_-a 그래서 요즘 줄거리가 점점 안드로메다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듦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완결이 되면 하루 날을 잡아서 이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한 번 늘어놓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결이 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코드기아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저번 주 일요일에 방영되었던 코드기아스 22화에서 잠깐 생각해 볼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나중에 전체적인 감상문을 쓸 때 이 이야기까지 집어넣자니 뭔가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느낌이 들 것 같고, 그렇다고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가자니 약간 서운한 느낌…….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그 이야기를 써 보고자 합니다.

  21화에서 기아스로 제국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루루슈는 곧바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전체에 대한 개혁에 들어갑니다. 처음 이 개혁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괜찮은 개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족과 귀족 계급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전면적으로 철폐하고, 재벌을 해체하며 식민지였던 넘버즈의 해방을 실행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흑의 기사단을 비롯하여 루루슈의 형인 클로비스는 루루슈의 본의를 의심하죠. 어찌 보면 루루슈가 제로일 때부터 주장하던 일의 연장선에 있는 조치들을 행한 것일 텐데 왜 그런 의심을 받게 될까요.

  해답은 브리타니아의 합집국 가맹 의결회의장에서 나타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브리타니아를 합집국에 가입시켜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내는 시점에서, 흑의 기사단 멤버들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죠. 루루슈의 목적은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독재정치를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요.


  여기서 조금 더 그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볼까 합니다. 루루슈가 즉위하기 전의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은, 황제의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형태는 군주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리타니아가 주권을 지닌 군주와, 그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황제를 견제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닌 귀족들 그리고 그 체제를 뒷받침하는 평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죠. 반면 루루슈가 새로 만들고자 하는 국가는 이와 다른, 동양의 제국(중국, 페르시아, 투르크 제국 등)에서 흔히 보이는 전제주의 국가입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절대왕정 역시 전제정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전제정은 군주정(monarchy)과 대비할 수 있는 형태의 전제정(despotism)을 의미합니다. 

  얼핏 보아서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이 두 정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군주정의 경우 군주를 제약하는 법이 존재하지만 전제정은 전제 군주의 의지만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에서 등장하는 기본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넓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강력한 전통과 관습까지도 포함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따라서 그 외형적인 모습만으로는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을 전제국가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황제의 직속 관료보다 사병과 영지를 거느리는 엄청난 귀족층에 의해 제국이 움직이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기존의 제국은 군주정에 가까운 통치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 이를 보충할 몇 가지 표현을 빌어오자면, 군주정에서는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종속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귀족 계급이 존재하고, 국가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명예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더 많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국가에 충성하는 귀족들의 허구적인 명예에 의해 국가가 움직인다고 본 것이죠. 하지만 전제정에서는 귀족들의 명예가 성립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제국가의 모든 신민은 군주 앞에 평등한 '노예'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국왕의 자의에 의해 국가가 움직이기 때문에 고정된 법칙이 없는 상태에서는 명예 역시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럼 전제국가에서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공포입니다. 군주의 자의에 의해 국가 전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신민들의 절대적인 복종이 필요하거든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특권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향유할 수 없습니다. 군주의 명령 하나에 오늘과 내일이 뒤바뀌는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지켜나갈 특권과 명예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코드기아스 안의 루루슈가 취한 행동을 보면 이 논리와 정확히 부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루슈는 모든 귀족들의 특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황제의 권력은 크게 강화시키죠. 이는 황제 앞의 모든 신민은 평등하다는 전제정의 원리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그가 기아스로 병사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때, 그전까지 흔히 사용하던 다른 특정 명령형 어구가 아니라 대놓고 '노예가 되어라'라고 선언한 것 역시 이러한 관점의 연장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실한 '노예'가 된 국가의 권력기관(특히 군대)을 이용, 루루슈는 제국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넓혀나가죠. 이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토벌하고요. 이는 단순히 '반란군을 토벌한다'라는 의미를 넘어서 공포에 의한 자의적 통치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중 스자크 단독으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TV중계로 방영한 것은 모든 신민들에게 이 '공포'를 극대화시켜 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한 반란군의 궤멸을 보여줌으로써 제국 전체에 '공포'를 각인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공포통치를 통해 제국 신민을 지배하고, 이를 이용해 합집국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브리타니아가 합집국에 참여할 경우, 세계 인구의 50%이상이 브리타니아의 신민이기 때문에 그 주권자인 루루슈의 뜻이 곧 합집국의 뜻이 될테니까요. 게다가 합집국의 경우 군사조직을 하나로 통일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 군부를 바탕으로 한 루루슈의 세계 군권 장악 역시 간단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계 전체에 공포를 각인시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작중 루루슈가 '모두 좋아하잖아? 민주주의를…'이라는 발언을 한 이유도 사실상 민주주의의 형식적 틀을 빌려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루루슈의 발언과 같은 논리로 보면 전제정 역시 민주주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모든 주권자들이 비록 타의에 의해서지만 한 사람에게 주권을 비롯한 권리를 넘겨 준 상태가 전제정이라고 해석해버리면, 전제정 역시 민주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라는 어거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합집국의 위원들을 강제로 협박하다시피 해서 브리타니아의 합집국 가맹을 강제하려는 상황에서 루루슈가 웃으며 '민주주의를 시작해 보자'라고 한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인 역설적인 발언이죠.

  클로비스가 루루슈에게 반기를 든 것 역시 단순히 '황제 루루슈'를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자기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아마 당연히 있겠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루루슈는 제국의 정체인 군주정을 파괴하고 자의적인 전제정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클로비스는 그 생각에 찬동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쪽이 더욱 맞을 것입니다. 게다가 루루슈의 전제정은 공포에 의한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아스를 통해서 실질적 관료계층을 모두 충심으로 지배하는 전제정이니까요. 루루슈의 둘도 없는 여동생 나나리가 루루슈를 향해 '넌 내 적이거등'이라고 선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루루슈는 너무 거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을 이상과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놓은 상태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가 과연 강력한 전제군주의 공포통치로 인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고 모두 다 독방에 가두어버리고 '자 이제 싸움이 없으니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능……'이라고 주장하는 건, 21화에서 황제 샤를이 집단무의식 어쩌고 저쩌고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다 뒤지고 변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싸울 일이 없으니 평화롭다능……'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주장과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뛰어나게 발전된 개념이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네요.


  그럼 앞으로 코드기아스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요.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결말이 사회 통념과 반대로 나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아마 루루슈의 전제정은 금방 무너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습…… 황제가 된 지 5화 만에 망하다니 -_-;;) 아마 다음화에서 나나리가 저쪽에 붙었다-_-는 걸 알고 슬퍼하지만, '네가 착각하는 거야. 오빠가 구해줄게'이러면서 더욱 카리스마 있는 악역을 수행해 가겠죠. 일단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글쎄요…… R2 들어서 워낙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줄거리 전개가 이어지다 보니 당최 예상이 되질 않네요. 혹시 제레미아가 충심으로 루루슈를 구하고자 루루슈의 기아스를 몽땅 캔슬해 버린다거나, 나나리의 눈이 떠지면서 그 기아스에 루루슈가 자살을 한다거나……… 으음 어떤 결말이 던지간에 제발 짜임새 있는 마무리가 지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드기아스 초반의 그 치밀한 두뇌싸움이 정말 그리워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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