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했을 때
요즘 스타리그가 재미있더군요. 꾸준히 챙겨보지는 못하고 그냥 가끔 생각날 때마다 찾아보는 정도이지만, 선수들의 플레이를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지금도 밖에 비도 오고, 딱히 급한 일도 없어서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몇 경기 보았습니다. 요즘 매니악한 이야기나 재미없는 이야기만 한 것 같기도 하고, 밖에 비도 오니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_-;;) 제가 처음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접했을 때의 이야기나 한 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해보게 된 건 1998년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어디서든 쉽게 게임방을 찾을 수 있지만, 그 해 초만 해도 아직 게임방이 막 폭발적으로 생기기 시작할 때라 주위에서 쉽게 게임방을 찾을 수 없었죠. 저는 그때도 여전히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_-;; 아직 네트워크 플레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는 않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친구들이 '게임방을 가자'라고 권하더군요.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구 : 야! 게임방가자!
본인 : 게임방이 뭐 하는데야. 나 오락실은 안 가는 거 알잖어.
친구 : 아니, 컴퓨터 놓고 게임하는데야 -_-;;
본인 : 컴퓨터면 그냥 집에 가서 하면 되잖어……
친구 : 게임 하나 가지고 여러 명이 겜하는 거야. 집에서 못한다.
본인 : 아 머드게임 같은 거? 오 그거 재밌겠다. 무슨 게임할 건데?
친구 : 스타크래프트
본인 : 야 나 그 게임 몰라;;;; 혼자서 해도 하나도 모를 텐데, 어떻게 같이 게임하냐 -_-;;
친구 : 매뉴얼 줄 테니까 읽어봐.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이니까 보면 대충 보면 알 거야.
그래서 엉겁결에 매뉴얼을 보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게임방을 가기로 이야기가 끝났고, 점심시간에야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매뉴얼에 있는 스타크래프트의 미션 줄거리를 읽을 시간은 없었으므로 유닛 설명만 보고 게임을 할 종족을 정해야만 했습니다. 흔히 처음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유닛의 역할과 테크트리를 쉽게 알 수 테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예전부터 인간으로 게임을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KKND에서도 서바이벌은 건들지도 않았고, 워크래프트 2에서도 오크만 했죠. (C&C에 등장하는 진영은 전부 인간이지만, 줄거리상 상대적으로 더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NOD와 소련군으로만 플레이했죠 -_-;; 듄 2에서는 하코넨……)
그때만 해도 C&C에 깊이 빠져있었던 저는 '역시 전략시뮬레이션이라면 웨스트우드지. 블리자드는 어디서 나온 듣보잡?'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전까지 스타크래프트를 건드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워크래프트도 어색해서 많이 하지도 않았었어요. 일단 유닛 이동이 마우스 오른쪽 클릭이라는 사실이 너무 어색해서 자꾸 실수를 했거든요. 유닛 생산도 건물별로 해야 되고, 중갑유닛 등의 강력한 지상유닛이 조그마한 유닛을 뭉개지 못하는 것도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고요 -_- 그런 저에게 던져진 스타크래프트 매뉴얼은 크게 탐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가서 게임을 하기는 해야겠기에, 종족을 고르기 위해 매뉴얼을 펼쳐 들었습니다. 위에 말한 이유로 테란은 그냥 지나치고, 프로토스와 저그 두 종족을 두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원 프로토스는 팔다리도 비리비리하고 정신력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무식한-_- 체력을 지닌 종족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ㅇㅇ……하는 느낌으로 넘어가고, 저그 페이지를 펼쳐보았습니다. 그런데……
!!!!!!!!!!!!!!!
거대하고 위압적인 덩치!
몸 여기저기 돋쳐있는 가시와 발톱!!
목숨 따위는 전혀 아끼지 않을 듯한 저 무식한 생김새!!!
'아,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바로 자세히 설명을 읽어보았죠. 많은 종족을 흡수해 강력해진 유전자 능력,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종족, 우주에서도 버티는 강력한 외피와 우주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강력한 발톱, 오버마인드의 수직적 통제로 인한 극도의 효율성 등…… 저그라는 종족은 굉장히 이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체력으로 그냥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저그의 체력이 세 종족 중 제일 약했지만요 -_-;;; 개미허리 프로토스가 제일 세더라고요) 게다가 저글링의 설명을 읽어보니,
'……저그 족의 용사 중 제일 잔인한 저글링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거대한 상대를 조각조각 찢어버린다……'
ㅇㅋ
거대한 캐리어
저그 족의 가장 잔인한 용사 저글링의 체력도 겨우 35인데!!!
저그의 만능 공중유닛 뮤탈리스크의 체력도 겨우 120인데!!!!!!!!
눈앞에 보이던 캐리어의 체력은 무려 450이나 되더라고요…………
하아…………………………………………………………………………………………ㅠㅠ
결국 그 게임의 결말은, 저는 하이브 주위에 빼곡하게 몰려 있던 건물과 유닛 한가운데에 핵을 맞고 (빨간 점이 표시되는 곳에 핵이 떨어진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습니다 -_-;;;) 마침 퀸으로 감염시켰던 인페스티드 커맨드센터 하나에 의지해 맵 여기저기를 표류하는 결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뽑아두었던 뮤탈은 스카웃에 전부 녹아버렸고요(지금이야 관광용 유닛 취급을 받는 스카웃이지만, 오리지널 시절에는 말 그대로 '하늘의 왕자'로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저의 주 종족은 여전히 저그입니다. 테란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정이 가질 않고, 프로토스는 제가 좋아하는 강력한 체력과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만 왠지 재수 없어서-_-;;;;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역시 우락부락하게 생긴 짐승 떼거리들이 제일 좋네요. 너무 오랫동안 만났더니 정이 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할 때 주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유닛으로 게임을 끝내기를 좋아하던 제가, 견제와 게릴라를 즐기게 된 것도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어쩌면 저그로 게임하기를 원하는 바람에 게임스타일이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10년 동안 게임을 해 왔지만, 게임을 잘하지는 못합니다-_-;;;; 정상적인 테크트리를 벗어나서 특이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테크트리와 타이밍이 거의 완벽하게 정해져 버린 지금은 그런 도박적 플레이가 성공하기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친구들과 만났을 때 여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고, 화려한 프로게이머들의 치밀한 전략과 화려한 유닛 컨트롤을 보며 감탄을 할 수 있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학교 선배가 '스타도 바둑처럼 천 년 갈 거다'라고 술자리에서 호언장담을 했다고 하던데, 그 말대로 스타크래프트가 천 년이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 세대에서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르신들이 바둑을 즐기듯 말이죠. (물론 이 말이 바둑과 스타크래프트가 같은 위상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나저나, 요즘은 스타보다 개랜디(개인 랜덤 디펜스), 개미디(개인 미니 디펜스)등의 디펜스나 컨트롤 맵이 더 재밌더라고요. 예전 각종 블러드나 젤다, 땅따먹기, 신전부수기 등도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만들어 내시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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