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스페리먼트 (Das Experiment)

  오늘 수업도 없고, 느긋한 아침을 즐기며 웹서핑을 하고 있던 도중, 심리학 실험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본 내용이라 그냥 슬쩍 지나치려고 하는 순간, 그 글에서 이 영화를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원래 그런 영화추천을 보면 '아 그런 영화가 있구나'정도로 넘어가는데, 왠지 이 영화는 살짝 끌려서 바로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본 지금, 약간 혼란상태에 빠져버렸네요.


DAS EXPERIMENT


  영화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20명의 피험자를 모아 8명은 간수, 12명은 죄수로 역할을 나눈 후 일정 기간 동안 감옥 안에 들어가 생활을 하는 실험을 실시하는데, 그 실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주는 것이니까요. 그냥 '모의 감방 실험' 정도로 줄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각각 간수와 죄수 역할로 나뉘었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상태가 점점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모의실험이라도 간수들은 죄수들을 통제해야 했기 때문에, 이 통제에 발생되는 충돌을 제거하기 위해 점점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게 되죠. 처음에는 제약사항을 강조하여 주의만 주는 수준에서 나아가 인격적 모독을 주고, 나중에는 실험에서 금지되었었던 물리적 폭력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죄수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통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죠.

  영화의 결말은 상당히 끔찍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간수 역을 맡은 피험자들은 그 간수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여 죄수 역의 피험자를 집단 린치, 구타하고 이를 제지하려던 간수 역을 맡은 다른 피험자와 연구진을 모두 투옥시켜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죄수 역의 피험자 중 사망자가 나오고, 다른 죄수들은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번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죠. 결국 실험은 2명 사망, 3명 중상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그 과정에서 가스총을 쏘거나, 진압봉으로 사람을 내리치거나, 칼을 쓰는 등 여러 잔인한 장면이 나오죠. 


  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더욱 무서웠던 건 이런 잔인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잘 나가는' 다른 영화들을 보면 이것보다 더욱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죠. 이 영화 정도면 약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실제로 있었던 실험에 기초하여 제작된 영화라는 점이 더욱 무서웠죠. 이 영화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이라는 이름의 실화에 기초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실제 이 실험은 영화처럼 극단적인 결말이 되지는 않았지만, 실험을 중간(14일 예정 중 6일째 실험 중단)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실험이 진행되어 가면서 실험 자체가 실험자들의 통제를 벗어나, 폭력적인 상황으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죠. 그 수준은…… 영화에서 살인이 일어났던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와 거의 흡사하다고 합니다. 죄수들의 폭동에 소화기를 분사, 실험참가를 거부하는 죄수 역의 감시자를 별도의 감방으로 옮겨 린치, 대소변 금지, 시멘트 바닥에서 취침 강요, 강제 탈의, 성관계 행위 강요, 독방 수감 등의 모든 가학적 행위가 죄수 역의 피험자에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죄수 역의 피험자들 역시 자신들의 이런 역할에 적응해 버리고, 심각한 정신적 장애증상을 보였다고 하죠. 평범한 인간들(이라고 영화에는 나오지만, 실제 실험에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건강한 24명의 남성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이 '감옥'이라는 특수상황 하에서 '죄수'와 '간수'로 역할을 배정받은 뒤 이에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모습이 정말로 소름 끼치도록 무섭더군요. 

  이는 단순히 간수 역을 맡은 피험자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는 말로 설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에서도 강조하지만, 간수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거든요. 그것보다 '감옥'이라는 틀이 만들어낸 권력적인 상황에 모든 피험자가 적응했다고 보는 쪽이 맞습니다. 평등한 20명의 인간이 자신들의 위치를 새롭게 설정해 주는 권력적 상황에 들어가자, 그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버린 것이죠. 여기서 우선시 되는 것은 주어진 권력관계 내의  위치와 역할이었습니다. 가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 간수만이 아니라, 피학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한 죄수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에 적응했거든요. 결국 인간은 상황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자아 역시 쉽게 파괴·변형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죠. 이게 또 엄청나게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이 실험이 '인간이 원래 악하다'라는 주장까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는 반대로 모두가 협력하고 평등하게 위치해야만 하는 실험 환경을 만들었으면 아마 이와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되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무서운 속도로 적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드네요. 물론 이 점이 환경이 변화하면 멸종해 버리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겠지만, 수천 년 동안 노예제도가 지속되고, 현대사회에도 존재하는 온갖 감시와 통제기관이 유효하게 작동하게 해 주는 동인이기도 하겠지요.  아마 현대인들을 고대사회에서나 존재했던 동물적인 노예로 다시 회귀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인간의 자아와 자존감을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한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수반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죠.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든 저렇게 인간이 쉽게 적응해 버린다면, 과연 어떠한 사회 형태가 인간에게 진정 좋은 사회일까 하는 점에서부터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납니다.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방황만 하는 현대인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복종하기만 하던 고대의 노예들이 정신적으로 더욱 건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현대인에게는 전통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각종 정신질환이 나타난다고 하잖아요. 물론 정신의학의 발달로 병을 새로이 밝혀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나'라고 하는 존재, 나아가서는 현대인 전체가 이 사회의 권력과 제도에 의해 얼마나 인간성에 손상을 입었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기고요. 예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보았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역시 영상으로 접하는 편이 감정적으로 더욱 끔찍하게 와닿아서 좋네요. 


  아, 여하튼 정말 끔찍한 영화였습니다. 뭐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팔다리가 뜯겨 없어진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주인공인 타렉이 인간성을 지킨 캐릭터이고, 간수 역을 맡은 피험자인 베루스가 굉장히 잔인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피험자들을 이따위 권력상황에 처하게 만든 톤 교수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제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를 들면, 칼로 고기도 썰 수 있고 나무도 자를 수 있고 사람도 찌를 수 있는데, 그 칼이 사람을 찔렀다면 잔인한 건 칼이 아니라 그 칼을 흉기로 쓴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나는 인권 유린 역시 침략자의 잔인한 성품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제도가 더욱 문제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말이 참전자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용서해 주자는 말은 아닙니다. (전혀 자유롭지 않은 것 같지만)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 역시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진정한 인간성'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권력관계'는 정말로 막중한 힘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을 듯하네요. 그리고 이를 결정해 주는 사회 제도 역시 정말로 중요하겠고요. 여기서 괜히 글을 더 쓰면 영화에서 너무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리는 것 같아 이쯤에서 줄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가 만들어내는 권력관계 역시 인간에게 굉장히 부정적인 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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