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학 분야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고전입니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 그 내용에 있어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현실주의적 정치의 관점에서 정치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통찰을 보이고 있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때는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 동기는 당시 나왔던 창세기전 3 덕분이었습니다 -_-;; 사실 창세기전 시리즈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동생이 그 패키지를 사 온 덕분에 게임을 해 보게 되었죠. 그런데 게임 내에서 버몬트 대공의 참모로 나오는 사람이 마키아벨리주의자(그 참모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로 등장하면서 주군인 대공에게 냉혹한 군주로 군림할 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꽤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던 듯합니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군주론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을 했었겠죠.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읽게 되었던 군주론은 당시에는 저에게 큰 인상을 남겨 주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내용이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와 다시 군주론을 읽어 보니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강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 책의 간단한 내용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당시 피렌체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에 헌상한 책으로, 현명한 군주가 되기 위한 군주의 행동과 자세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서술은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관점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사실상 정치인(군주)이 갖추어야 할 분야에 대한 거의 전방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주는 실제로 그 품성이 너그러워서는 안 되고, 때에 따라 너그러워 보이기만 해도 된다’나, ‘군주는 민중에게 공포를 통해 경외감을 주어야 한다(물론 계속해서 공포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군주는 자신이 필요할 경우 조언을 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조언을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등 일반적인 세간의 상식으로는 거부감이 느껴지는 문장을 치밀한 논리와 서양사에서 기초한 풍부한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사실 이러한 면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악의 화신처럼 묘사될 때도 있죠 -_-;;). 그 외에도 당시로서는 앞서나간 생각인 국민 군대(상비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냉혹한 국제정치의 이면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은 이 책을 해당 분야의 성경이라 부를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2. 군주론의 보이지 않는 전제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완벽할 정도로 치밀하고 자세한 내용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의 내용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음모와 책략이 난무하는 정치계와, 자국의 국력 신장과 국익 보호를 위해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정치, 그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여러 관점의 충돌이 일어나는 현대 사회에서 이 ‘군주론’은 현실을 정확히 짚은 훌륭한 저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누가 정리하더라도 이 이상 당대 현실에 맞는 뛰어난 감각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 책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책 내의 너무나도 완벽한 서술 때문에 독자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전제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인 성악설적인 인간론과 일원주의적 시각의 정치론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책 내에 거의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제를 가정한 상황에서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내는 솜씨가 너무 뛰어나 이 책이 전제로 지니고 있는 저러한 가치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도되어 버릴 수 있다고 말을 하면 될까요. 기독교에서 성경에 나오는 신의 역사와 예수님의 활약을 보고 ‘와 정말 신은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막상 그 세부적인 생각에 매몰된 나머지 제일 중요한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이 책의 탄탄한 구성과 논지에 따른 주장이 현실에서도 꽤 자주 목격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이 책이 가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며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약하다는 전제는 이렇게 간단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실제 정치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정치 사례가 우세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를 협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분명 군주론에서 공화정을 맹목적으로 부정하거나 ‘인간은 악하게 살아야 한다’나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 난 뒤에 소수의 천재-_-들을 제외하면 그 책의 논지를 전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볼 때, 이 책은 ‘군주는 비인간적이고 냉철하며 잔인하고 약삭빨라야 한다’라는 결론만을 기억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죠. 저 역시 고등학교 때 읽었던 군주론에 대한 생각을 말해 보라면, 저 정도 기억밖에 나지 않더라고요(제가 멍청한 걸까요;;).
3. 무서운 책
따라서 군주론이 분명 명작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를 깔끔하게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 자신만의 인간관과 가치관이 확립된 다음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주의 관점에서의 정치서적으로는 정말 완벽하지만, 그 완벽함 덕분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마저 영향을 받을 수 있거든요. 물론 현실주의적인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그다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게임이론에서 복수의 내쉬균형이 존재할 경우, 게임에 참여하는 당사자들 간의 협력으로 현재의 낮은 균형에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높은 균형으로 파렛토 개선을 할 수 있다면, 그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ㅋ 아마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자신이나 자국에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동시에 그 이상 사회나 국제관계가 개선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제관계는 영원히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당하는 투쟁의 장이 되겠고, 사회는 기만과 음모,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불신과 억압의 사회가 되겠지요.
물론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분이 죄가 있다면 죄명은 ‘너무 책을 잘 쓴 죄’이겠죠 -_-a 산삼이 몸에 좋고 영양가가 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신생아가 이를 먹으면 큰일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훌륭한 책도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어느 정도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고가 정립된 분들이 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하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의 관점에 경도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정말로 훌륭하지만 무서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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