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요즘은 고등학교만 돼도 다 배우는 데다 각종 매체를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신선함은 매우 떨어지는 소재이군요. 뭐, 언제는 신선한 소재를 다뤘냐고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ㅋ 일단 이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의 사전적인 의미부터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부 및 기타 등등의 부문에서 상대적으로 우월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그 의미를 정의하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권력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의무를 선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죠.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때, 칼레를 포위한 영국 왕이 칼레 시민들을 살해하는 대신 시의 유력자 6명에게 죽음을 맞이할 것을 요구하고, 칼레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시의 유지들이 목숨을 내놓기로 하지만 여차 저차 해서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상당히 감동적입니다만, 이번에는 이 이야기가 주가 아니므로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죠. 자세한 이야기는 로댕이 만든 예술작품의 이름인 '칼레의 시민들'로 검색해 보시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ㅋ
위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단어는, 얼핏 보면 '감동적이고', '영웅적이며', '고귀하고', '헌신적인', 시쳇말로 '폼 좀 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평소에 자신이 누리던 권리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마저 저버리는 지도층의 책임감…… 아아, 이 얼마나 감동의 도가니입니까. 게다가 저렇게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리는 지도자들의 모습과 현대 우리나라의 사회 지도층을 비교해 보면 이 감동이 더해지지요. (아 물론 반작용으로 약간의 짜증도 생길 수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분명 이상적인 지도층의 모습을 그리면서, 현실에서는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2. 강요된 현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겉으로만 볼 때 성립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사회 지도층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회의 존속 아래에서만 그 권리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었으니까요. 대표적으로 왕정 체제의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의 왕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로 유명한 청 왕조의 푸이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메메드 6세,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에서 망명을 하게 된 왕들의 삶이 그 단편적인 예입니다. 지배자 자신이 지배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던 사회가 붕괴되면 그들은 새로운 지배자 혹은 다른 사회의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의탁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로 곤두박질치고 말죠. 그렇기 때문에 특정 사회의 지도자는 자신의 위치를 반드시 지켜야만 할 강한 동기를 지니게 됩니다. 설사 그것이 때로는 자신의 목숨조차 담보로 할 경우에도 말이지요.
게다가 봉건사회에는 주요 재산이 토지와 그 토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이나 보석으로 전 재산을 바꿀 수도 없고, 만약 바꾼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죠. 따라서 이를 빼앗겨 사실상 '사회적인 사망선고'를 받을 처지로 지도층이 몰린다면, 이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결국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자신의 사적 재산을 지키기 위한 그들 자신의 피치 못할 선택일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서민에게는 대못을 박으면 안 되고, 고소득층에게 대못을 박는 상황은 괜찮은가?'라는 발언을 하며 종부세 적용 기준을 국가 제일 현안 중 하나로 놓고 있는 우리 리만브라더스들과 그 근본은 같은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미덕'으로 불리는 것일까요. 개인이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키는 것일 뿐인 행동인데요.
사실 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미덕이 되는 진짜 이유는, 이들의 사익 추구 방향이 해당 사회의 공익 추구 방향과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혼자 살아갈 때 보다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때 자원 확보에 훨씬 용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해당 사회가 무너진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일차적으로 부를 더욱 확보할 가능성이 없어지죠. 게다가 이러한 사회의 붕괴는 흔히 다른 세력의 물질적·신체적인 약탈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성원들 전체에게 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사회를 지키는 쪽이 자신의 이익 극대화와 사회 전체의 이익 극대화 양쪽을 만족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지도층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일을 '눈앞의 위험에 맞서 사회 전체의 공익을 지키는 일'로 포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양자가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하고요.
3. 현대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종된 이유
이와 같은 관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바라볼 때, 현대 사회에서 왜 이 '사회 지도층의 덕목'이 실종되었나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이유부터 간단하게 말하면,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자본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사람, 지식, 교육, 문화 등 기존의 비시장적인 부분까지 점점 자본으로 변환이 가능해지고 있으니까요. 이와 같이 모든 권리가 자본으로 치환된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권리의 이동과 보존이 간편하다는 말도 됩니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시면 될 듯하네요.
물론 현재 위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분야가 자본으로 치환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아직 자본을 운영하는 '인간'이 국민국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거든요.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동이 용이해진 것은 사실이고, 이는 사회를 지키는 것이 사회 전체 구성원과 사회 지도층의 공동의 이익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과거와 같이 사회 지도층의 모든 권리가 그 사회에 묶여있지 않고,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회 지도층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정도가 약해진 것이죠. 간단한 말로, 이 나라 망할 것 같으면 그 돈 가지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가면 되잖아요. 이 사회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권리를 자본의 양만큼 누릴 수 있으니까요.
4.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제 필요 없나
그럼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단지 사회적 피지배 계층의 바람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신의 권리 행사에 큰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그러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우리 덕분이니 위험할 때는 그만큼 일을 해라'라는 말은, 말 그대로 부탁이자 기원이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구걸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바라보면, 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적선을 요구하고 그를 들어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거지'로 보이겠죠. 따라서 이를 멸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요즘 자주 나오는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는 생각에 심취한 분들이라면, '우리가 평소에 가난한 너희를 먹여 살려 주었는데, 감히 이러한 요구를 하다니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군!'이라는 생각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이러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꽤 많이 보이시는 듯합니다. 특히 정치계 쪽에서요.
하지만 정말로 아쉽게도,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첫째 이유로, 아무리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라도 다른 사회로 사회적 권리를 완전히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저차원적인 이유이지만, 동시에 제일 절박하게 다가올만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언어, 사회 문화, 인종 등의 문화적 문제는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거든요. 또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흥 나는 오랜 유학생활로 이미 몸도 마음도 완벽한 뉴요커인걸'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서구문화 쪽이 더욱 마음에 드는데'라고 말하실 분들이 계실까 봐 약간 부언하겠습니다. 아무리 해당 국가의 문화에 적응한다고 해도, 한국에서의 지위와 같은 수준을 누리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자본이 소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많은 자본이 소요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적으로 가난해짐을 의미하는 말이고요. 이는 어떤 나라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한국에서 누린 권리가 비교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한국의 지도층은 한국의 권리를 누리는 부분에 있어 제일 효율적으로 토착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확보한 자본으로 최대한의 효용을 달성할 수 있죠. 그리고 이는 한국에 부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물론 이민 대상 국가 현지에서 토착화에 성공하면 되겠지만, 이는 적어도 부의 원천을 완전하게 해당 국가로 옮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말이죠.
두 번째로, 피지배층의 불만이 극대화되면 사회가 변동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간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죠.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다수가 묵인하는 이유는, 그 지식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라도 인정하면서 사회를 유지하는 쪽이 나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는 수준을 언론이나 문화적 제약을 통해 최대한 낮게 조정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수준이 낮아진다고 이러한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겨먹더라도, 나도 그를 통해 조그마한 이익을 보기 때문에 그냥 이를 인정한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재미있는 실험 내용 한 가지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게임이론에서는 유명한 실험입니다. 실험자가 두 피험자에게 만 원을 줍니다. 이때 첫 번째 피험자는 자신이 가지고자 하는 액수를 말하는데, 두 번째 피험자가 이에 동의해야만 둘 다 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두 번째 실험자가 액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둘 다 돈을 받을 수 없게 되고요. 기존 경제학에서 가정하던 '합리적 인간'을 부정하는 내용을 지닌 이 실험 결과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관의 개념을 크게 바꾸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면 재미있겠지만, 글도 점점 길어지고 본 주제와는 큰 관련이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이 실험에서 살펴볼 부분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조건을 붙여 둘 사이의 우월을 가린 후, 우월한 위치에 선 사람에게 금액의 제시를 맡길 경우 분배되는 금액의 차이가 더욱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조건은 돈을 나누는 것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단순한 스피드 퀴즈를 통해 승자를 가린 경우라도, 승자는 두 사람이 평등한 관계에 평균적으로 분배되던 금액보다 많은 양을 자신의 몫으로 제시하고, 패자는 그를 수용하는 결과를 보여주었거든요. 이는 사람들이 상호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인지할 경우 그만큼 손해를 감수하게 된다는 결론을 가져옵니다. 이 실험처럼 별 볼일 없는 퀴즈로 우월 관계가 형성된 경우에도 저러한데, 개인의 선천적 능력, 후천적 환경, 기타 행운 등 여러 가지의 '타당한 차별'이라 생각되는 이유로 인해 형성된 우월 관계에서는 이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부의 편중현상이 벌어지는 것일 테죠.
하지만 해당 실험에서 아무리 우월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도 자신이 '9990원'을 가진다고 요구할 경우 그 요구는 거부당했습니다. 불평등을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말이죠. 이 실험과 같이 우월적 위치에 존재하는 사람의 요구를 거부하고 '판을 엎는' 행위는 대표적으로 1910년의 러시아 혁명이 있습니다. 아, 또 이 예만 들면 '좌빨' 운운하실 저차원적 생명체도 있을 수 있으니 1776년의 미국 독립 전쟁과 1789년의 프랑스혁명도 언급하겠습니다. 또 너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말할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도 추가로 기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나친 사익 추구는 그것이 가진 합리적인 이유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사회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거든요. 빌 게이츠가 상속세 제도의 강화를 주장하는 이유로 든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체 체제의 원활한 유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면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호수 위의 백조
잔잔한 호수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백조가 우아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끊임없이 발을 휘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단지 심심해서 물장구를 치는 것이 아니고, 물 위에 떠 있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것이죠. 이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대표되는 지도층의 도덕적 모범도 단지 취미 삼아 시혜적으로 시행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지도층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실시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과거와는 달리 지도층이 사회에 자신의 권리를 얽매인 정도가 적어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의무를 적게 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도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를 제외하더라도 근시안적인 사고로 비난을 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당장의 이익 극대화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
농사를 지어 작물을 걷기 위해서는 최소한 종자를 심는 수고는 해야 합니다. 굉장히 더러운 비유지만, 하나의 사회는 그 사회의 지도층에게 최적화된 토양과 같습니다. 그 토양에서 두고두고 수확하는 재미를 보려면 적어도 종자를 뿌리기라도 해야죠. 지력 고갈을 막기 위해 비료도 주고요. 이건 땅이 '제발 종자와 비료를 주세염'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취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행동이죠. 요즘과 같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종된 사회는 사회의 지도층이 '내가 잘나서 이렇게 많은 작물을 걷는 거야'라는 생각에 비료도 주지 않고 작물이 자라는 것만 걷어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땅의 지력이 얼마나 더 버텨줄지 모르죠. 최저임금이 너무 높아 실업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를 낮추어야 한다는 등의 말(아 물론 이에 경제학적인 근거가 있기는 합니다. 물론 지금의 임금 수준이 그 실업 유발 수준에 있는가는 추가 연구를 통해 증명해야 하겠죠. 하지만 연구 없이 일단 이론적 근거가 있으니 주장하고 보는 이영희 노동부장관의 그 대담함! 정말 멋집니다 ㅋㅋㅋㅋㅋ)을 보면 아직 우리나라의 사회지도층은 '이 땅의 지력이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나 봅니다. 뭐, 백조가 발 젓기를 멈추고 얼마나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눈치 빠른 백조는 깊이 빠지기 전에 물장구를 칠 테고, 둔한 백조는 그 긴 턱 밑까지 물이 차올라야 현실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온몸을 퍼드덕대겠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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