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 Red Alert 3
요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말하면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를 제일 많이 떠올리겠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전략시뮬레이션의 대표작이라 하면 당연히 웨스트우드의 C&C(Command and Conquer) 시리즈를 들 수 있었습니다. 듄 2부터 시작해서 각종 C&C시리즈들을 열심히 섭렵하였던 저도 당연히 '전략시뮬레이션이면 웨스트우드지!'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발매하는 게임들의 판매량 감소, 새로운 게임 개발 실패 등으로 사정이 어려워진 웨스트우드가 EA에게 인수되었을 때는 꽤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웨스트우드가 EA에게 인수된 후에도 C&C 시리즈는 꾸준하게 발매가 되었습니다. 비록 어느 순간인가부터 'Westwood Studio'라는 개발사 브랜드조차 폐기되고 완벽한 EA의 하위 제품군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꾸준하게 발매되는 시리즈 중에는, C&C 레드얼렛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본래의 C&C 시리즈에서는 NOD와 GDI가 초현대적인 배경을 두고 서로 싸움을 벌이지만, 이 레드얼렛에서는 소비에트와 연합군이 그 싸움의 주체입니다. 어찌 보면 C&C 시리즈의 외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리즈는, 레드얼렛 1에서는 원래의 C&C 시리즈와 줄거리 상 연결되는 부분이 약간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소련의 지도자 중에 NOD의 지휘자인 케인이 포함되어 있거든요. 나중에는 다른 지도자들 살해하고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하지만 레드얼렛 2부터는 본편과의 연관성은 모두 사라집니다. 시리즈 하나가 그 자체로 완결이 나는 단편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있게 되었죠. 아마 본 C&C시리즈와 이 레드얼렛 시리즈가 설정·배경·등장인물 등이 너무 겹치면 양 제품이 상호 간 차별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Canibalization)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름 인기가 있기 때문에 이 레드얼렛 시리즈를 간단히 버리기도 아까웠을 테고요. 그래서 본편인 C&C 시리즈와의 차별성을 위해 외전 격인 레드얼렛은 강제로(?)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분위기가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문제는 C&C의 본편이 초현대적이고 심각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레드얼렛은 반대로 어느 정도의 기술 수준을 유지한 채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갖는 게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_-;; 덕분에 레드 얼렛 2는 '개그얼렛'등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와 같은 이미지 변화는 나름 성공적으로 생각되었나 봅니다. 이번에 나온 레드얼렛 3는 더욱 명랑하고 밝게 제작되었더라고요 -_-;;; 색감도 화려하고, 캐릭터들의 행동·성격·분위기도 재미있는 요소가 많이 나타납니다.
위는 예시로 들 수 있는 미션 중에 등장하는 쇼군 엑스큐셔너입니다. 초현실적인 동시에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번 시리즈부터는 미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도 많은 공을 들인 것이 관찰됩니다. 모든 브리핑 화면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한 장면으로 진행되거든요. 넵, 사실 연기가 약간 어색하기는 합니다 -_-;; 하지만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리고 미션에 나오는 여자분들…… 물론 그전까지 C&C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들이 나름 인기를 얻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너무 그쪽을 인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깊게 파여 가슴이 강조되는 밀리터리 코스프레 복장 -_-;;;;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듯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을 보니 왠지 레드얼렛 시리즈가 안드로메다행 열차……에 탑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게임 내의 시스템은 꽤 많은 발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게임 진행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미션을 하면 크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스커미시 게임을 할 때 기존의 C&C를 생각하고 게임을 했다가는 컴퓨터에게 초반에 크게 털립니다 ㅠㅠ 그동안의 C&C가 국내 전략시뮬레이션의 기준이 되는 모 게임과 비교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그 진행 속도가 느려서 긴박감을 느낄 수 없었던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듯하네요. 건물 별 생산이 가능하게 되고, 왼쪽 클릭 이동이 오른쪽 클릭 이동으로 바뀐 것은 C&C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스타일을 대세에 따라 포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확실히 이 쪽이 편하기는 하더라고요. 하지만 각 진영 간의 밸런스는 심하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욱일제국군은 육상전에서 답이 나오지를 않네요. 주력 전차인 쓰나미 탱크는 그야말로 안구에 쓰나미를 몰고 오고, 메카 텐구는 육상, 공중 양쪽 모두에서 종이탱크·비행기 취급을 받는 수준입니다. 고급 지상 유닛인 파동포 전차는 전략적인 활용도가 소비에트의 아포칼립스나 V4, 연합군의 미라지 탱크에 비해 심하게 떨어져서 킹 오니 하나만을 믿고 가야 하는 수준이고요. 해상전 최종유닛은 연합군 쪽이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중반까지는 소비에트의 아쿨라 잠수함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고, 후반에도 소비에트의 드레드노트나 욱일제국의 쇼군 전함에 비해 연합군의 함정이 상대적으로 빈약하거든요. 뭐, EA에서 멀티플레이 쪽을 좀 더 활성화시키고 싶다면 패치나 전략을 내놓겠죠 ㅋ
※ 욱일제국에 대한 이야기
이번 시리즈에서 새로 추가된 진영이 윗 스샷 오른쪽에서 볼 수 있는 욱일제국입니다. 딱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가 큼지막하게 박혀있죠. 어째서 2차 세계대전 때 패전국이 된 일본이 냉전의 양 진영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는 레드얼렛 3의 시작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지만, 역사적 사건이 다른 방향으로 일어났다면이라는 가정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레드얼렛 3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없었더라면'이라는 가정으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붕괴 직전의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연합군에게 기술적 우위를 가져다준 아인슈타인을 제거하기 때문이지요. 덕분에 이 레드얼렛 3는 아인슈타인, 정확히는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게 되었지요.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유는 단순히 원자폭탄 때문은 아닙니다. 우선 연합군보다 엄청난 기술적·자원적 열세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자체가 장기전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고(4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자원 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릴 정도의 엄청난 자원 수탈 행위를 생각해 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무리한 전선 확장과 점령 지역의 불안정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붕괴 요소를 안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당시의 식민지 조선과 대만은 그나마 안정적인 지배지역이었습니다 -_-;;) 게다가 미드웨이 해전 및 태평양, 중국 지역에서의 잇따른 군사작전 실패도 겪었고요. 따라서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의 종장을 상징하는 정도의 위치만 가지고 있지, 재래식 전력만으로도 일본은 충분히 패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드얼렛 3는 원자폭탄을 제거하면서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고 가정한 듯싶습니다. '만일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지 않고, 그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권을 성공적으로 수립했다'라는 가정을 하면, 레드얼렛 3에서 개그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는 욱일제국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 자본주의 - 제국주의라는 멋진 대비축도 마련되고, 기존의 어떤 나라보다도 현실성 있으면서 특이한 문화권의 거대 세력을 가정할 수도 있으니 욱일제국이 등장한 것도 어찌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요소이죠.
게다가 저 욱일제국은,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다소 오해가 가득한 일본상'을 아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와 연합국을 모두 '야만인'이라고 깔보며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모두 지배하는 것이 욱일제국의 숭고한 운명이라는 멋진 대사와, 나노테크롤노지라는 이름 하에 등장하는 각종 변신로봇 -_-;;; 들, 무사도가 어쩌고 하면서 브리핑 전에 다도와 분재, 서예를 즐기는 왕가의 모습 등은 상당히 코믹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특수 기술 중에 가미카제도 나옵니다. 욱일제국 미션을 수행하다 보니 열도의 매니악함과 대륙의 스케일이 만난 결정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하지만 이러한 코믹함을 통한 비하는 레드얼렛 3의 모든 진영 캐릭터가 다 보여주는 요소이고, 오메가 유리코 따위의 여고생 영웅-_-의 예만을 들어 레드얼렛 3가 일본을 까기 위한 게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청나게 삐뚤어진 이미지 위에 서 있는 욱일제국이지만, 이것이 일본을 까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오류라고 생각된다는 말이죠. 레드얼렛의 모든 미션을 통틀어 유럽은 항상 양자의 각축전이 일어나는 전장으로 나오고 미션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도 못하는데 이것이 유럽을 까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이건 단지 EA에서 제3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집어넣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이 게임의 재미를 위해 집어넣은 그 욱일제국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은 피해자들의 땅에서 그 후손으로 태어난 제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지네요.
만약 미국 기업인 EA에서 멋지게 비행기를 조종하여 세계무역빌딩에 충돌시켜 얼마나 많은 인명을 성공적으로 살상하는가라는 미션을 완수하는 게임을 만들거나, 개척민들이 자랑스럽게 인디언들의 머릿가죽을 벗겨 수집하는 게임을 만든다면 모르겠지만(만약 진짜 이러면 원래 그런 막장들이었구나라고 생각이라도 하겠죠), 지금 보아서는 아시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만들어낸 게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기들이 겪지 않은 고통이니 우리는 알 바 아니라다는 태도 같네요. 뭐, 그쪽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걸 심의에서 통과시켜 준 영등위나 이런 게임을 열심히 한글화 해서 발매하는 EA 코리아는 둘 다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서 욱일제국의 지배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엄청 아쉬운 건지, 역사를 무시할 정도로 돈이 좋은 건지, 아니면 역사관이나 가치관 따위의 도덕적 가치가 애초에 아예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한심하다는 말 이외에는 그다지 하고 싶은 말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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