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치팅 컬처(Cheating Culture)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치팅컬처

  얼마 전 블로그에 서돌출판사의 관계자 분께서 책에 대한 리뷰 제의를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리뷰 제의를 받아 본 적은 없었지만,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기에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12월이 되고, 출판사 분들께서 책이 인쇄된 날 바로 책을 보내 주셨는데 마침 제가 여러 가지 일로 집에 내려간 상태라 책을 읽는 게 조금 늦어 버렸네요. 생각보다 책이 두꺼워서 살짝 놀라기는 했습니다만, 올해 내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내용의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하나의 상황을 가정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 도중, 당신은 시험장 앞 탁자 안에 시험의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 상태에서 그 답안지를 보고 시험을 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아래의 새로운 조건이 번호순으로 하나하나 적용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언제쯤 답안지를 보려고 시도할 것 같은가요?


1. 그 시험은 당신의 일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험입니다.

2. 현재 시험장에 감독관 등,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3. 만약 답안지를 보다 적발되면 한 문제를 오답으로 처리하는 페널티만이 적용됩니다.

4. 그나마 그 페널티가 없어졌습니다. 적발 시에도 어떠한 불이익이 없습니다.

5. 그 시험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답안지를 보고 시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번 항목부터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끝까지 답안지를 보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현재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거나 윤리가 실종되어서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현재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 책은 현재의 미국을 대상으로, 사회적으로 속임수를 쓰는 경우가 더욱 많아진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쓰인 책입니다. 사회과학 이론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캘러헌이 풍부한 사회과학적 지식을 뼈대로 엄청난 양의 각종 사례를 모아 이러한 문제점을 짚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훌륭한 사회과학 서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각 장에 알맞게 적용되는 금융, 스포츠, 학교, 언론 등의 각계각층에 걸쳐 수집된 그 엄청난 사례들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사례들이 모두 미국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책의 담론들이 현재의 우리나라와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비교 적용이 조금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 나와 있는 사례들을 죽 읽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리, 배임 사건과 놀랍도록 비슷한 양상이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금액이 훨씬 크고 관계자와 관계 기관이 미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양자 간에 다른 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이에 대한 분석 역시 우리나라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자가 단순히 미국적 가치의 변화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으로 최근 급속하게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경제 정신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거든요. 우리나라 역시 1998년을 기점으로 최근 십여 년 간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엄청나게 확산되어 왔기 때문에, 가슴 아프게도 저자의 분석이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해당 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더욱 증가시켜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신자유주의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은, 그 체제 하에서 경제생활을 하는 경제주체들이 변화된 규칙에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라는 사실인 듯합니다. 심화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체제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순간 잃어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모든 경제 주체가 '승리를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남들보다 앞설 방도가 보인다면, 비록 그것이 상식적인 도덕 수준에 위배된다 할지라도 그 방도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죠.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모든 경제 주체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변해간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윤리나 사회 규범으로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마약, 문란한 성 생활, 낙태 등과 같은 부분과는 달리, 승자가 모든 것을 얻어가는 가치는 모든 이들이 긍정하고 있거든요. 아니, 긍정을 넘어 거의 찬양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승리자가 되면 모든 비도덕적인 일들이 잊히고, 찬양받는 사회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비도덕적인 방편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죠. 게다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은 편법의 확산을 매우 쉽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이유가 됩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라는 이유로, 조작을 통한 절세(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탈세이죠)나 지적 재산권이 있는 각종 소프트웨어, 미디어 파일의 다운로드 등은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이와 같은 의식 변화와 함께, 각종 제도 역시 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바뀌어 온 것 역시 편법 문화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각종 정부, 단체 조직이 더욱 '효율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어 오며, 이들은 자신의 임무인 불법 행위에 대한 규제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탈세가 광범위하게 시행되는 것을 알면서도 국세청은 그것을 추징할 인원도, 예산도 없고, 각종 기업 범죄에 대해 검사가 수사를 하려 해도 역시 시간과 비용, 인원이 부족합니다. 기업의 장부를 심사해야 하는 회계사들도 생존을 위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고객인 기업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교육기관 역시 피교육자들의 부정행위를 적발하다 경제적 불이익이나 복잡한 상황에 엮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죠.

  사회 의식과 제도의 이와 같은 변화는, 편법의 사용을 광범위하게 용인할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회의는 다시 윤리 의식의 약화라는 피드백을 가져오게 될 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불신과 부정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백 미터 달리기에서 옆의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것이 허용되면, 오토바이가 없는 사람들이 그 경기에 참여할 리가 없잖아요. 물론 이 책은 사람들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상황(반사회운동 또는 혁명)에 이를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된 미국에서 구성원들이 예전보다 사회 제도를 불신하고 그것을 점점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적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물론 이 해결책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임은 분명합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겠죠 -_-;;) 이 책에서는 새로운 사회 계약이나 새로운 성과주의의 도입, 윤리 교육의 강화 등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넵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방법으로 '교육을 잘해서 착한 사람을 만들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환경을 만들면 된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거든요.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죠 -_-a 신자유주의 이념을 폐기하고 새로운 이념을 도입하면 된다라는 말 역시, 어떠한 새로운 이념이 도입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듭니다. 사실 이와 같은 사항들을 이 책에서 완벽하게 제시한다면, 데이비드 캘러헌이란 분은 아마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이은 대 사상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책의 저자가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일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었지만, 그와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우리 사회가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일정 수준까지 훌륭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그 사회의 진행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책은 분명 현 사회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나는 훌륭하게 밝혀주고 있거든요. 현재의 우리나라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가 단순히 세계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거나, 친북 좌빨들이 설치고 다녀서이기 때문이라거나, 대통령인 이명박씨가 부패한 인물이고 집권당인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이어서 발생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를 접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조금 더 근본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근현대의 사상가들과 경제학적 이론, 제도의 연구 등이 필요하겠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교양 수준의 접근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의 저자도 결정하지 못한 애매한 결론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 보거나, 다른 이들과의 토론 등으로 유추해 보는 작업도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글의 제일 초반부에 언급했었던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을 보는 학생이 부정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학생 개인이 사악하고 비윤리적이어서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일을 행하는 선비정신을 가진 분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학생이 개인적으로 비난받을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선비정신과 같은 가치를 깔보고 한심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사회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저 학생이 컨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컨닝을 했을 때 따라오는 이익을 줄이고 적발 시의 손해를 증가시키는 제도적 보완을 우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모든 이들이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있고, 부정행위 자체가 자신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제도를 파괴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그 학생이 스스로 깨닫고 윤리적으로 이를 내재화시키는 것이겠지요. 간단한 답이로군요 -_-a 이를 사회 전체에 어떻게 확대시킬까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서돌출판사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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