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종교의 자연사


종교의 자연사
  얼마 전(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빛형이 블로그에 데이비드 흄이 쓴 '종교의 자연사'라는 책의 일부를 소개해 주셔서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구해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절판이더라고요 -_-a 그래서 며칠 전 학교 도서관에서 따로 찾아 읽었습니다. 저자인 데이비드 흄의 화려한 이름과 딱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종교의 자연사'라는 제목 때문에 책을 보기 전까지 살짝 긴장하고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책의 두께가 서문, 해제 등을 모두 포함하여 200쪽이 약간 넘는 적은 분량이었습니다. 사실 책의 두께를 보고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기뻐했어요 (……) 그럼 이제부터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이 번역본에서 느낀 불쾌한 구조를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습니다.

1. 편집자 서문
  오래된 고전의 번역본은 대부분 작자의 글 외에 추가로 번역자나 편집자의 서문이나 해제, 후기 등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추가적인 글들은 비전공자에게도 책의 내용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접근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 책의 내용에 원활하게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각종 배경지식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추가적인 글 자체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물론 해제를 쓴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 내가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만, 자기가 읽지 않으면 될 일이잖아요. 게다가 상당수의 책들은 해제가 있어서 그나마 무슨 내용인지 아는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이 책의 제일 앞에 나와있는 편집자 서문은 상당히 거슬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구조화시켜 요약, 정리한 해제가 본문 뒤에 분명히 위치하고 있고, 서문은 본문 앞에 위치하는 글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복잡하지 않고 본문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책들은 대부분 이러한 내용으로 서문이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 '편집자 서문'의 내용은 '유일신자인 신학자가 본 이신론자인 데이비드 흄의 저작 평가'입니다. 아직 본문을 접하지도 못한 독자들에게 서문에서부터 본문의 가치판단을 멋대로 내려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책을 다 읽은 뒤에 다른 사람의 평가가 어떤지 궁금해서 찾아보는 것도 아니고, 아직 책의 내용도 모르는데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 한계를 감안하고 볼 때 흄의 이러한 저작은 놀라운 면이 있다'라는 평가를 먼저 접해야 하는 웃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 해제의 내용은 매우 건조합니다. 다른 책의 해제와 비교하면,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해석자의 판단을 최대한 배제한 채 거의 요약 수준으로 책을 정리하고 있으니까요. 이건 개인적인 취향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정도일 듯합니다. 하지만 역시 서문은…… 역시 독자에 대한 매너가 부족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아니면 독자들을 자기 수업이나 설교를 들으러 온 학생 또는 신자들로 생각했던지요. 이렇게 신학대학 소속이 아닌 독자도 분명 있는데 말이지요 ㅋ 더욱이 저는 기독교도도 아니기 때문에, 유일신에 대한 독실한 믿음의 시선에서 데이비드 흄의 책을 멋대로 해석하는 이 서문이 더욱 몰상식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만일 '지금이야 개나 소나 말하는 사랑과 박애, 평등이 예수 사상의 주요 골자이므로 그 자체는 딱히 큰 특이점은 없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꽤 독특한 시각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따위의 편파적인 해설을 기독교도가 본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책의 본문은 굉장히 좋은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웃긴 자리에 있는 이와 같은 편파적인 서문 때문에 꽤 불쾌한 느낌이 들었어요.

2. 다신교의 발생
  불쾌한 서문에 관해 너무 길게 글을 썼군요 -_-a 이제 책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의 게임 스샷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명 4 종교 테크
  위의 스크린 샷은 문명 IV의 과학기술 발전도 부분의 일부를 본뜬 것입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스샷에 담겨있는 내용이 이 책의 제일 큰 주요 내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주요 내용이 바로 종교철학 중 '종교의 발생'을 살펴본 것이고, 저 스샷 역시 게임 내의 고대 문명에서 종교가 발생하는 테크트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임 내에서 종교의 발생 방향을 '신비주의 → 다신교 → 일신교'라고 간단하게 표현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종교의 발전사를 논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과 존재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통해 이 세상을 관통하는 섬세한 법칙과 완전성의 발견에서 이끌려 나오는 절대신의 존재 인식…… 이 아닙니다. 흄은 물론 그러한 인식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다수의 인간들에게 이해받고 지지받지 못해서 금방 잊힌다고 보았거든요. 직관적으로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믿기 힘들어하잖아요.
  그럼 인간은 어떻게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을까요. 흄은 이를 자연에 대한 공포와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막 태풍이 불거나 땅이 흔들리고, 비가 오지 않거나 전염병이 도는 등 여러 가지 무시무시한 상황이 일어나는 이유가 당시의 인간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원인을 고민한 결과, 자연을 움직이는 신이라는 존재를 추론해 내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보면 부적절한 인과관계이지만, 당시의 인간들에게는 최선의 합리적인 추론이었겠지요.
  그리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자연을 다스리는 신'은, 필연적으로 복수의 인격신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자연은 때에 따라 인간에게 축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을 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신이 주관한다고 보는 편보다 불행을 주는 신과 행복을 주는 신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이해하기가 편하잖아요.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의식, 인식 상의 한계 때문에 신 역시 인간과 같이 정념을 지닌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어거스트 콩트가 말했던 문화의 발전 단계 모델인 '신학(신화)적 단계 - 철학(형이상학)적 단계 - 과학(실증)적 단계'에 대한 인식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인식이 발전하면서 인식 수준이 발전했다는 이 이야기는, 결국 과거의 인간은 인식 수준이 지금보다 낮은 위치에 있어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되잖아요. 따라서 '시대의 한계로 인해' 인간들은 다수의 인격신을 만들고, 이 신들의 존재를 위한 각종 이야기(신화)가 구성되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르게 발생한 신들이 다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바로 인간이 접하는 자연과, 그것을 받아들여 해석하는 인식의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신비주의에서 최초의 종교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이고(책에는 신비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없습니다만, 문맥상 신비주의의 정의를 집어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신교가 일신교에 비해 앞서 존재하게 된 이유입니다.

3. 일신교의 발생
  그런데 이렇게 다신교가 성립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위해 추론하여 만들어진 신이, 이제는 확고한 원인으로 자리 잡게 됨으로써 자연 현상을 주재하는 주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자연 현상에서 추리된 신이, 그 추론에 대한 믿음 덕분에 이제는 자연 현상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위치로 격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인간과 같은 인격신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 역시 그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찬양하면 자신을 더욱 어여삐 보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선물을 마치고 아부를 하는 행위를 신에게도 하게 된 것이죠. 따라서 온전히 신에게만 바치는 정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 희생 행위를 수행하고(음식을 태워버리거나 자해하는 등의 행위), 아름다운 조각, 상징이나 화려한 수사어구 등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신을 찬양하는 작업 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과 병행하여 인간의 인식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점점 신에게 추상적인 '절대자'의 개념을 바치게 됩니다. 즉 찬양을 지극하게 하려다 보니 더 이상 찬양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리고 완벽한 절대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는 일신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4. 다신교와 일신교의 비교, 부침
  이렇게 다신교와 일신교의 발생 배경에 대한 추론을 거친 뒤, 이 책은 양자를 비교하여 논지를 전개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부터는 책의 내용에 대한 몰입도가 크게 떨어지게 되더라고요 ^^;; 책의 내용이 재미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전까지의 내용이 흄의 날카로운 직관과 탄탄한 논리에 의해 창조된 경탄의 세상인데 비해, 여기서부터는 지금까지의 논지를 바탕으로 현실을 분석, 해석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반부와 같은 내용 구성을 엄청나게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후반부는 조금 처지더라고요. 사탕을 먹은 후 바로 배를 먹으면 배의 단 맛이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앞부분이 주는 즐거움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뒷부분이 덜 재밌게 느껴졌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ㅋ
  하지만 이 뒷부분의 이야기 역시 앞부분이 가지고 있던 논리의 연장선상으로 현실의 모습을 깔끔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신교가 상대적으로 가지는 포용력이라던지, 일신교가 가져다주는 여러 덕목들에 대한 훌륭한 설명 등이 나오거든요. 그 이후 일신교의 타락에 따른 다신교화 현상이나, 신에 대한 인간의 직관적인 인식이 기독교적 진리와 부합한다는 등의 재미있는 논지 전개도 나옵니다. 확실히 이 부분은 해제가 편집자 서문 등에서 지적하듯이 그 시대의 한계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약간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흄이라는 철학자가 당시까지 남아있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받을 공격을 피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홉스와 같이 '책 전체를 하나님에게 들어 바치는 식'으로 서술하여 그를 달성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흄은 자신과 같은 이신론자 역시 온전하게 신을 믿는 방법 중 하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실제로 흄이 이신론자였는지, 무신론자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던간에,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역시 조금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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