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쿠레나이 (紅)


  제가 이 애니메이션을 본 건 약 세 달 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꽤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그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은 역시 성가시더라고요. 하지만 감상문을 꼭 쓰기로 한 스스로와의 약속도 있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운 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간단히 -_-; 몇 줄 정도 언급을 해 볼까 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에는 애니메이션의 주요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해당 작품을 아직 감상하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 주세요.



1. 줄거리

  주인공인 쿠레나이 신쿠로는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사건을 처리해 주는 해결사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쿠로에게 그의 스승이자 의뢰를 맡겨 주는 베니카로부터 하나의 일거리가 들어옵니다. 가문에서 탈출한 쿠호인 무라사키라는 7살의 여자아이를 지켜달라는 의뢰였지요. 고민하던 신쿠로는 그 일을 수락하고, 거기서부터 많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애니메이션의 주 내용은 신쿠로가 무라사키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중반까지는 격렬한 전투 또는 긴박한 긴장상황은 그리 많이 조성되지 않습니다. 쿠호인 가의 당주인 쿠호인 렌죠가 무라사키를 되찾아오는 일을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에 급하게 추진하지 않아서 주인공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한가한 여유 속에서 무라사키는 새롭게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됩니다. 그동안 쿠호인 가 안에 갇혀 자라온 무라사키에게 신쿠로가 사는 낡은 아파트인 스미다레장과, 그곳에 거주하는 별난 이웃인 야미에, 타마키, 그리고 신쿠로의 학교 선배이자 신쿠로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스승님의 딸인 호즈키 유노, 베니카의 부하이자 신쿠로와 무라사키의 경호를 맡은 야요이 등은 정말 새로운 세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점차 숨겨져 왔던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쿠호인 가문이 가문 외의 여자에게서는 후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근친상간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세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가문의 여자아이를 집 안에 마련된 오쿠노인이라는 곳에 가두다시피 살게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데 실패한 무라사키의 어머니 소쥬가 딸은 자신과는 다른, 사랑을 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무라사키의 탈출을 베니카에게 의뢰한 점 등이 차츰차츰 표면으로 떠오르죠. 그리고 이러한 비밀들이 거의 다 드러났을 무렵, 결국 무라사키는 다시 쿠호인 가로 끌려가게 됩니다.

  베니카는 소쥬에게 받은 의뢰내용은 다 충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라사키에 관해 관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신쿠로는 무라사키가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 오쿠노인에 평생 갇혀 사는 삶일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라사키를 그 안에서 구하고자 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결국 죄 없는 베니카와 야요이마저 신쿠로에게 딸려 오쿠노인에 들어가게 되죠. 그리고 거기에서 무라사키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기를 나가자는 신쿠로에게, 무라사키는 오쿠노인에서는 나오겠지만 쿠호인 가를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 안에서 가문의 전통에 맞서 싸우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지요.

  뭐, 간단히 몇 줄로 정리하기는 했지만 무난한 줄거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12화라는 짧은 분량이 지니고 있는 한계 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대충 다 했으니까요. 사실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이러할 경우 필연적으로 해설·독백·회상이 많아져서 지루한 분위기로 빠지기가 쉽죠. 비록 쿠레나이에 애니메이션치고는 꽤 많은 격투신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중간중간 늘어지는 분위기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쿠로와 무라사키, 주위 인물들의 이야기 외에도 무라사키의 과거, 신쿠로의 과거, 각종 배경에 대한 설명 등이 계속 나오니까요. 다행인 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상당히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또 넘어가지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작화

  한 줄로 말해보자면…… 꽤 특이합니다. 일단 무라사키가 상당히 귀엽다는 것은 별개로 치고 -_-; 인물들의 표정 변화가 상당히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애니메이션에서 표정 변화를 묘사할 때 흔히 생략되는 부분인 눈매, 눈가의 주름, 눈꺼풀 등 눈의 변화를 여기에서는 많이 묘사하고 있거든요. 때로는 작화 붕괴인지 의도된 묘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죠. 덕분에 캐릭터는 자주 일그러지고 -_-a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캐릭터에게 과도하게 부가되는 아름다움은 상당히 감소되어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실제로든지 애니메이션에서든지 표정이 풍부한 쪽을 보는 게 훨씬 재미있잖아요 ㅋ 그래서 개인적으로 꼬마들을 놀리는 걸 좋아합니다 -_-;;;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저는 인물보다 주위 배경 묘사를 먼저 고를 듯합니다. 때로는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배경 묘사가 너무 자세하거든요. 특히 1화와 최종화에 나오는 오쿠노인 내의 왜색이 짙은 벽화들은 쿠호인 가의 분위기를 그 어떤 대사나 움직임보다 강하게 묘사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풍경들 역시 '굳이 이 정도까지 묘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히 그리고 있고요. 해당 장면의 분위기를 주위 배경으로 나타내려고 하나라는 추측이 들 정도였습니다.


3. 오쿠노인

  이 작품 내 모든 갈등의 시발점은 오쿠노인이라는 장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내부 장소'라는 의미의 이 오쿠노인은, 쿠호인 가에 있어서 가문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이자 가문의 치부입니다. 세간에 용납되지 않는 근친상간이 이루어지지만, 가문 외의 여자에게서는 후손을 잇지 못하는 쿠호인 가에게는 대를 잇는데 꼭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미래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무라사키는, 이 오쿠노인의 중심이자 쿠호인 가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찾아 무라사키가 오쿠노인을 나가는 것은 가문에 있어서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 당주인 렌죠의 아들이자 차기 당주가 될 류지는 무라사키가 오쿠노인 밖에 나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하지만 현 당주인 렌죠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당주로서 가문을 유지해야만 하는 의무가 항상 그를 지배해 왔고 또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인 소쥬가 그 안에서 고통받다 죽음을 맞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라사키의 탈출 사건이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합니다. 또한 류지가 무라사키를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말리지 못하고요. 결국 최후에는 무라사키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이 모순되는 양자 간의 타협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무라사키는…… 일단 일곱 살 주제에 -_- 작중 다른 인물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운명을 부정하던 소쥬나, 선택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렌죠, 그 운명에서 탈출하기를 권한 신쿠로와는 전혀 다른 해결책인, 가문 내에서 오쿠노인을 부정하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지요. 무라사키는 자신이 가문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의무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무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족쇄인 오쿠노인 자체는 부정하죠. 이러한 면에서 자신이 가문의 일원임을 인정하여 그 중압감을 짊어지는 동시에, 어찌 보면 그 중압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오쿠노인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앞으로 평생 동안 가문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투쟁을 하는 삶을 살아갈 것임을 의미합니다.

  어찌 보면 그 해결책이 그나마 양자가 타협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가문을 위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족쇄를 차고 살지는 않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 가문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말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뭐 다행히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체외수정 - 대리모 테크를 탈 수도 있겠지만 -_-;; 그동안 행해졌던 인습에 맞서 싸우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개화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일본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선택지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나라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고요.


4. 결론

  이런저런 이야기를 써 내려왔지만, 결국 이 작품은 한 편의 훌륭한 비급 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체 자체는 다소 진부할 수도 있습니다만, 특이한 배경 설정과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격투신 등이 그것을 잘 받쳐 주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정보 자체가 많은 것은 약간의 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러한 점에 주목하지 않아도 전체 맥락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게 짜인 구성과 전개는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5화 중간에 나오는 '고등어 된장조림'이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다시(맛국물) 만드는 법을 제외한 모든 레시피를 무라사키가 직접 불러준답니다 ㅋㅋ 뭐 다시야 사실 뻔하니 -_-;; 심심하던 차에 대충 우려내서 따라 만들어봤는데 고등어의 비린 맛이 약해져서 마음에 들었어요. 이번 애니메이션에서 건진 제일 큰 수확이랄까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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