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트교의 유일신에 대한 짧은 생각
크리스트교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민감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기 상당히 꺼려지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원래 괴력난신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님의 가르침(子不語怪力亂神)에 깊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오늘 마침 친구와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이쪽으로 발전했기에 간단하게 이에 대해 몇 줄 써 볼까 합니다.
참고로 저는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고, 크리스트교의 유일신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자'보다 '미신'쪽에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니 논리적으로 이야기가 불가능한 크리스트교의 광신자 분들께서는 가볍게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아,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크리스트교에서 나타나는 유일신인 하나님이 과연 어떤 존재일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및 세계 각지에서 크리스트교에 의해 생겨난 긍정적,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따라서 재작년 아프가니스탄에 봉사로 위장하고 선교하러 갔다가 순교할 뻔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뒤로 협상을 해 준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샘물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나, 소망교회의 장로이자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직을 맡고 계신 위대하신 이명박 각하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분도 뒤로 가기를 누르시는 게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크리스트교에서의 하나님은, 스스로의 존재만으로도 그 존재가 완벽한 절대자입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이것저것 복잡하게 정의하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 존재 자체가 다른 존재에 의해 드러나는 불완전한 다른 존재와는 달리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말이죠. 뭐, 이거야 크리스트교와 사실상 한 뿌리인 유대교, 이슬람교에서도 다 마찬가지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완전한 존재자라기보다 인격신에 가깝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정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대충 생각나는 큰 일만 말해봐도 이러한 사실은 금방 드러나지요. 선악과를 따먹는 잘못을 한 아담과 이브를 가차 없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쫓아내고, 타락한 인간들을 홍수로 징벌하고 선량한 노아의 가족만을 살려준 뒤 '내 다시는 이렇게 벌주지 않을게'라고 직접 말하고,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큰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하여 신심을 시험하는 등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인격화되어 (그것도 상당히 잔인하고 편파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인격화된 신의 모습은 거의 모든 고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추천해 주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전혀 추천해서는 안될 것 같은 난잡한 내용이 많은 그리스·로마 신화 외에도 인도의 창세신화,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 등을 보면 모두 이와 같은 인격신의 모습이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신약성서로 넘어가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이 크게 달라집니다. 화도 내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인간들에게는 가차없이 처벌의 철퇴를 내리던 '상당히 편파적'인 하나님이 갑자기 자신의 대리자인 예수님을 세상에 내린 이후부터는 초규범적이고 윤리적인 존재가 되거든요. 드디어 초월적 절대자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같은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는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지요.
사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모습이 변한 것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은 꽤 많이 있습니다. 우선 구약의 경우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깃든 신화에 바탕해 쓰인 책이고, 예수가 이를 바탕으로 크리스트교를 고등종교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등종교가 가져야 할 보편성을 크리스트교가 획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할 수 있거든요.
이와 같은 종교의 발전사적인 측면 외에도, 인간의 지식 수준이 높아져서 절대자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즉 구약시대보다 신약시대의 인간들이 사고가 더 확장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더욱 고급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옮겨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크리스트교의 신자라면 이와 같은 설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쓴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을 빌어 이 세상에 내려준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물론 여기서 인터페이스인 인간의 수준에 따라 이러한 사실이 변화하였다고 말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굉장히 수정주의적인 생각이죠. 예전 이신론자들을 몇 백 년간을 단순히 이단으로만 취급하던 배타적인 크리스트교에서 이와 같은 설명은 용납되기 힘들 것입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크리스트교의 신이 과연 어떠한 존재일까 다시 생각을 해 보도록 하죠.
1.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고대 종교가 고등종교로 발전하며 정립된 존재
이 쪽이 논리적으로는 제일 튼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시 종교들은 주로 인간의 인식 밖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경우가 많은데, 크리스트교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인간들이 만들어낸 존재라는 뜻이지요. 물론 크리스트교의 신은 다른 문화권과 다르게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이라는 점은 약간 특이한 점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국 또는 마야, 아즈텍 등에서도 이와 같은 유일신과 그 하부의 신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유일신 체계가 보이기는 하니 아주 특별한 형태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하나님이나 옥황상제나 태양신이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이 맞다면, 크리스트교의 신은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2. 인간의 부족한 인식능력으로 완전한 절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완전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얼핏 들으면 '너는 개뿔도 모르는 놈이니 닥치고 믿으라'는 말 같아서 불쾌한 느낌을 주는 말이지만, 의외로 이 말은 꽤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1번 항목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말들은 결국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와서 코끼리는 뱀과 같이 생겼다'라고 주장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거든요.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칸트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물자체 자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고 단지 감성과 오성에 의해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네요. 따라서 이런 조악한 수준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수준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럼 너희들은 그 절대자를 얼마나 알고 있고,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라는 질문이 그것이지요. 즉, 같은 인간이므로 같은 인식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그쪽의 주장은 진리임이 증명되냐는 반문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그렇게 부족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죄를 사하고 가르침을 주시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셨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 경우 역시 '예수님이 그러한 존재라는 증거를 인간의 인식 수준에서 설명해 봐'라는 질문에는 마찬가지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나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간의 감성과 오성에서 이해 가능한 수준까지 풀어 설명해 주는 친절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 이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을 쉽게 깨우쳐줄수 있는 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들조차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양날의 칼이 되네요.
3. 존재한다. 믿어라.
제일 단순하지만 제일 강력한 주장입니다. 서양의 중세시기, 아직 철학이 신학의 시녀이던 시절에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무려 천 년 동안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위의 논지를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이는 포기되어 버립니다. 코끼리의 존재를 장님들에게 완벽하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지요.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등장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그냥 '오직 믿어라'라는 원리주의적인 주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천 년동안이나 크리스트교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에서는 이와 같은 종교개혁운동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곧 유럽 전역으로 들불과 같이 번지게 되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저 주장이 어떠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만일 제가 크리스트교 문화권에서 태어났고, 크리스트교를 부정할 경우 사회적, 사상적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면 '하늘의 해와 달이 지금 이 시간에도 존재하는 것을 믿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어떠한 개연성도 느끼질 못하겠네요.
사실 크리스트교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던 이유 중 하나는, 로마 전역으로 종교가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지배 계급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배우지 못한 로마의 하층민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따르면 천국에 간다'라는 단순한 교리가 쉽게 각인되니 전파가 용이했지만, 희랍 철학의 전통에 선 로마의 지배 계층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거든요. 하지만 사회를 지지하는 민중 계급의 단결을 이끌어내고, 사회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 크리스트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였기 때문에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부터 별별 철학이론들을 다 끌어내와서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뭐,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현재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의 신앙심에 대해 어떠한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트교를 믿는 분들은 '이도교의 궤변'으로 취급하시면 되겠고, 믿지 않는 분들은 마찬가지로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주장을 보셨다고 생각하면 되실 듯하니까요. 뭐,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않지만 근대화 이후의 우리나라에 제일 강력하게 남아있는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에 속했을 경우 생겨나는 이득 때문에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말이겠고요.
하지만 이 글을 지금까지 꾸준하게 읽어오신 크리스트교 신자분이시라면 무턱대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아무 데서나 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크리스트교도에게 부과되는 최대의 의무 중 하나는 바로 복음전파이지만, 저렇게 복음 전파를 표방하여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크리스트교에 대한 반감만을 키우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와 같은 어린양들을 위해 가르침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솔직히 절대자를 믿는 편이 훨씬 편하거든요. 의심할 수 없는 대전제가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굉장하고 편리한 일인지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편리함을 누리고 싶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부실한 신은 믿을 수가 없어서 믿고 있지 못하는 상태이거든요. 급하다고 지푸라기를 잡는다고 물에 뜨는 건 아니잖습니까.
맨날 짧게 쓴다고 거짓말하고 길게 쓰게 되는군요. 에이 그럴 수도 있죠 뭐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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