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취푸(곡부)│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


  중국, 나아가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지성과 사상의 가장 큰 원류는 공자로부터 체계화된 유교입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서구 문명이 전달된 이후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고, 유학자들의 공자에 대한 태도가 현대의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마치 신을 모시는 것과 같이 보여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들도 유교를 종교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교는 단어 그대로 공자와 공자의 학문적 후계자들(儒)의 가르침(敎)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오해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아시아 고전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子曰)이라고 쓰여있을 경우 그 선생님은 무조건 공자일 정도(다른 사람들은 성을 붙여 표기)로 학문 및 사상적으로 현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지배적인 사상, 철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나라 시기에는 공자를 신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공자를 한, 당, 송, 원나라 시대를 거치며 제후, 왕으로 격상하다 명, 청대에는 선사(先師, 큰 선생님)로 추봉 할 정도로 숭상하였으며, 그 후손 역시 역대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예우를 받았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여진족의 침입(정강의 변)으로 강남으로 조정이 피신(남송)할 때도 당시 연성공(衍聖公) 작위를 받은 공자의 직계 자손을 데려갔었고, 현대 중국에서도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피신(국부천도) 시 연성공을 데려가 지금도 관련 관직을 수행중일 정도로 중국에서 공자의 위상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여행 이야기를 하는데 서두가 긴 이유는, 현재 중국 취푸(곡부)에 있는 공묘, 공부, 공림이 과거의 화려한 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영광의 처절한 몰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구 체제의 상징인 공자는 타도할 대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모든 나라에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거나 도입될 경우 흔히 일어나는 정·반·합의 과정으로 딱히 굴욕이랄 것도 없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공자가 봉건체제의 상징으로 비판받은 것 역시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유교 자체가 교조화되고, 현실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많아 비판의 여지도 많았으며, 근대 이전의 학문 체계는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형태라 건설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힘든 부분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공부와 공묘의 비석과 석물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문화재를 부수고, 공림에 묻혀 있던 공자 후손들의 시체를 부관참시한 것은 극도로 야만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유교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여진족과 몽고족이 중국을 점령할 때도 공부는 함부로 부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中華)으로 자처하던 자들의 후손들이 야만족(四夷)으로 낮춰 부르던 다른 민족들도 하지 않았던 문화 파괴행위를 자행하였으니 그 한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부족한 소프트파워 보충 및 상업적 이익을 위해 공자를 브랜드화하여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어 사실상 공자와 유교를 부관참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파괴된 공부와 공묘가 정비되고 관광객으로 접근이 용이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는 다행이지만, 마치 박제된 동물을 보는 것 같은 서글픔도 드네요.


  한탄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유적지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곡부 공자 유적(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and the Kong Family Mansion in Qufu)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개별적인 명칭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공묘(孔廟) : 공자와 다른 성현들의 사당 및 역대 왕조들이 공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 공부(孔府) : 공자의 후손들이 거주하며 공무를 처리하던 장소

· 공림(孔林) :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지


  공묘와 공부는 붙어있으며, 공림은 약 3km 떨어져 있어 도보 이동은 살짝 부담이 되는 거리이므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편합니다.


 


곡부 성 남문 측면사진
  공묘가 위치한 곡부 성의 남문입니다. 중국 특유의 벽돌 성벽과, 평지성에서 흔히 보이는 높은 성벽이 인상적입니다. 물론 곡부 성은 작은 성이라 다른 대도시의 성벽에 비해서는 높이가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성문과 성벽입니다. 곡부의 경우 지리적으로 요지도 아니고, 공자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는 특수성으로 전화에 휘말릴 가능성도 적어 최소한의 치안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이 축조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곡부 성 남문 내부 정면사진
  시간이 좀 있으면 성벽 위에도 올라가 보고 싶었습니다만, 일행도 있고 시간제한이 있어 둘러만 보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사진도 이동하며 급하게 찍어 빛 번짐 현상이 있네요 ㅠㅠ 상당수의 사진이 이런 식이라 나중에 확인하고 살짝 속이 상했습니다.


<공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공묘와 공부는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우리나라의 국보급 유적과 유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61년 저 제도가 최초로 운영될 때부터 공묘와 공부는 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문화대혁명 때 지키지 못하였다니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다는 표시입니다.

공묘 조감도
  하단에는 공묘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격식과 권위가 있는 건물일수록 내부까지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문의 수가 많습니다. 공묘의 경우 9개의 문이 있는데, 설립 당시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시대가 흐르며 문이 점점 추가되어 왔습니다. 공자를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것을 표현하여 사대부의 민심을 얻으려는 왕과, 그로 인하여 부와 권위가 더욱 높아지는 공부 양자의 일치하는 이해관계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각 문의 뜻은 잘 나와있는 사이트가 많으니 궁금하실 경우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영성문
  영성문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태화원기
  태화원기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성묘
  지성묘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시문
  성시문입니다. 여기서에부터 계단에 용 부조가 보입니다. 공묘 내에서 용이 자주 보이는데, 중국에서 용은 건축물에 함부로 쓸 수 없는 동물이었습니다. 특히 발톱이 다섯 개인 용(오조룡, 五爪龍)은 황제와 친왕 정도만 쓸 수 있는데, 공묘 내에서는 그 용도 가끔(?) 출몰하곤 합니다. 

다리
  들어가는 길에 있는 다리입니다.

대중문
  대중문입니다. 송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대중문 현판
  문들이 만들어진 시기와 만든 주체가 다르다 보니 글자체가 확실히 제각각입니다.

성화비
  명나라 때 세워졌다는 성화비입니다. 한가운데 문화대혁명의 상처가 보이네요. 하단의 귀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성화비 측면
  역대 왕조들이 세운 비석이 정말 많습니다. 

비석들
  거의 다 부서진 비석을 이어 붙여두었고요. 왜 부서졌는지는 이제 지치니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홍무비 비정
  명 태조 주원장(홍무제)이 건립한 비석과 그 비정입니다. 안의 비석은 아쉽게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왔네요.

십삼비정
  13개의 비석이 보관되어 있어 십삼비정이라 불리는 건물입니다. 금, 원, 청나라 대 세워진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이쯤 오면 비석은 익숙해져 있어 눈에 크게 뜨이진 않습니다만, 황색 기와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명나라 때 황색 기와는 자금성에만 허용되는 기와였습니다만, 유일한 예외가 여기 보이네요. 공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비정입니다. 

행단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를 했다고 추측되는 위치에 세워진 행단이라는 건물입니다. 건물 옆 쪽에도 용이 부조되어 있는 조각물이 있습니다.

선사수식회
  공자께서 직접 심으신 회화나무(선사수식회)라고 합니다. 나무 전체를 찍은 사진은 빛 번짐이 너무 심해서 못 쓰게 되었네요…….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몇 번 죽을 뻔하다 살아난 나무라고 합니다. 공자께서 직접 심으신 게 정말 맞다면 저 나무의 수령은 무려 2500년이 되겠네요.

대성전 전경
  대성전입니다. 자금성과 같은 황금 기와와 용이 부조된 기둥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체적으로 익숙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보다 곡률이 적은 중국식의 지붕과 처마가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대성전 정면
  너비가 매우 넓어 사진 안에 담으려니 힘이 드네요.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느긋하게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습니다.

처마 위 잡상
  그래도 처마 끝의 잡상에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성전 내부 친필편액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친필편액(황제가 직접 쓴 현판)입니다. 최상단의 만세사표(萬世師表)는 강희제가 썼다고 하네요.

공자상
  공자상이 보입니다. 사진이 절망적으로 나와 잘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이때 나름 감동이 좀 있었어요.

대성전 기둥
  용이 부조된 대리석 기둥입니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중국에서의 공자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산 증거입니다.

대성전 측면
  측면은 우리나라의 궁궐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단 위압적인 석물과 지붕, 처마, 단청 등의 양식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대성전 옆 전각
  대성전 측면에 있는 건물입니다. 용도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각 앞 계단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이 날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이 참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사람이 많다 투덜거렸는데, 알고보니 저 날이 적은 편이더라고요.


<공부>

노벽
  한나라 시절 벽을 허물다 과거 진나라 때 공자의 후손이 분서갱유를 피해 숨겨둔 논어 죽간을 찾은 노벽입니다.  마침 당대 중국에는 훈고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을 때이니 숨겨둔 죽간을 본 유학자는 마치 보물상자를 찾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중광문
  길 가운데에 뜬금없이 문이 세워져 있습니다……만, 이 문은 연성공(공자의 후손)에게 황제의 칙사가 성지를 전달할 때 열리던 중광문이라는 이름의 문입니다. 명나라 때 세워졌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평시나 문이 열려있을 시에나 가운데로 출입하는 사람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공부 전경
  공부의 건물 중 하나의 전경입니다. 사람들이 실 거주하던 곳이라 제례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 공묘에 비해 그 화려함은 덜 합니다만, 그나마 편안한 느낌이 있습니다.

실내 소품
  마지막 연성공은 국부천대 시 대만으로 이주하여 이제 이 공부에는 공자의 직계 후손도 없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세습 작위가 없으므로 연성공도 없는 이 공부에는 이제 유물만이 남아 있습니다. 곡부에 공자의 대표 직계 후손이 없던 시기는 송나라 시기 정강의 변 이후 처음일 것입니다.

괴석
  분명 수려함을 뽐내고 있는 괴석입니다만, 개인적인 감상이 투영되어서인지 어딘가 쓸쓸하게 보이네요.

고층 건물
  용도를 알 수 없던 고층 건물입니다. 창문으로 보아서는 4층인 듯한데, 무슨 용도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위치를 보면 군사적 목적의 감시탑 용도일 것 같긴 합니다. 

용
  과거 연성공이 정무를 보던 곳이라 각종 시서회화가 많이 있습니다.

중국식 단청
  전반적으로 단청이 좀 오래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국은 검은색 계열의 벽돌 및 기와, 칠 등으로 건물 자체가 우리나라보다 좀 어둡게 보이는데, 단청도 낡으니 어두움이 더욱 강조되네요. 물론 붉은색으로 꾸미고 색칠한 건물이 너무 많아 이러한 칙칙한 분위기가 강하게 부각되지는 않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목숨 수 족자
  과거가 멈추어져 있는 듯한 인테리어입니다. 이제는 중국 대륙에서 공식적으로 쓰지 않는 번자체와 가운데 강조된 목숨 수 자가 왠지 강한 인상을 주네요.

골목
  중국 고대 건축물 중 큰 저택은 침입자 방지 및 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 높은 벽을 이용한 인위적인 골목을 만들어 둔다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질적인 단청
  공부가 넓기도 넓지만, 조금 놀라운 점은 건물 간의 양식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었습니다. 단청을 보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처마 아래
  검은 기둥도, 특이한 처마와 단청도, 단청 안의 모습도 다 특이해서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공림>

공림 입구
  공묘 및 공부와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림의 입구입니다. 이 문은 최근에 정비를 한 모양인지 깔끔한 색들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역시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성문
  지성문 앞에 있는 생물은 기린일지 해태일지, 아니면 전혀 다른 생물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조예가 있지는 못해 확신을 할 정도는 아니라서요. 다만 공자는 사실상 천자 수준의 예우를 받았기에 해태상의 배치가 가능했을 듯하고, 화기에 민감한 숲과 무덤을 지켜야 했을 터이니 아마 해태가 아닐까 추측만 해 보았습니다.

지성림
  문으로 들어가 조금 걸으면 지성림이라고 쓰여 있는 문이 다시 나옵니다. 세월의 흔적이 절로 느껴지는 문입니다.

수수교
  공림에 가기 전에 건너야 하는 수수교입니다.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강의 이름이 수수(洙水)입니다. 

수수교 현판
  이 현판과 기둥의 돌은 무슨 돌일지 궁금합니다. 현대에 시멘트로 세운 것 같이 생겼는데 명나라 때 세웠다니 그건 아닐 테고…….

형전 외부
  형전이라는 건물입니다.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고, 향로가 있는 것을 보아 제단이 분명한 것 같은데, 시간이 없어 급하게 지나쳐 아쉽습니다.

형전 내부
  공자로 추정되는 인물상과 뒤쪽의 용이 잘 보입니다. 용은 발톱이 다섯 개네요. 확실히 공자의 권위는 천자와 견줄 만했었습니다.

자공수식해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직접 심은 나무(자공수식해)라고 합니다. 나무 자체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죽어 그 흔적만 남았지만,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십 대 제자(공문십철)로 일컬어지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공자 사후 6년간 시묘살이를 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또한 당대에 뛰어난 능력으로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약하는 동시에 장사를 통해 재산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유학자들은 공자의 제자 중 안회를 제일로 쳤지만, 학문에만 매진하다 (아마) 기아에 시달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회보다 사회적인 성공의 정점에 선 자공 쪽이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인기가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자묘

  공자의 묘입니다. 대성지성문선왕묘라고 쓰여 있는데, 저 비석이 세워진 원나라 때 추봉된 공자의 공식 작위명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기 때문입니다. 큰 비석 뒤에는 금나라 때 세워진 선성묘(위대한 성인의 묘)라 쓰인 작은 비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함께 한 일행들이 있어 너무 빨리 돌아보아 아쉬운 부분이 많았는데, 나중에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 곳입니다. 천천히 살펴보고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보이는 점이 많아지는 여행지이거든요. 나중에 필히 다시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공자의 혈연적 후손들이 좀 더 군자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공묘(孔庙, Temple and Cemetery of Confucius)

공부(孔府, The Confucian Family Mansion)

Shendao Rd, Qufu, Jining, Shandong, China

(山东省济宁市曲阜市神道路)



공림(孔林, The Cemetery of Confucius)

Lindao Rd, Qufu, Jining, Shandong, China

(山东省济宁市曲阜市林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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