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개성 선죽교 사진
제가 하고 있는 위치기반 증강현실(AR) 게임에서 작년부터 실제 지역의 명소들을 게임 내의 주요 장소로 등록할지 여부를 유저가 직접 심의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의란 게임에서 일정 레벨이 된 유저들이 특정 지역의 주요 장소가 역사, 문화, 사회적 가치가 있냐를 심의하여 게임 내의 기능을 부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저도 해당 레벨 조건을 충족하였기에, 주요 장소에 대한 심의를 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래의 장소가 심의 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심의 대상 장소의 사진이 개성의 선죽교였기 때문입니다. 선죽교는 개성공단에서 10km 이내의 거리에 위치하는 역사 유적인데, 서울에서도 약 50~6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은 2007년~2008년 한시적으로 운영되던 개성관광 프로그램을 통해 개성을 방문한 경우를 제외하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저곳을 갈 수 없습니다. 사진을 다운로드하여 구글 이미지검색으로 검색해 본 결과, 인터넷에 업로드되어 있는 선죽교 사진 중 이 사진과 같은 형태의 사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사진을 가져다 쓴 게 아니고, 특정인이 업로드한 고유의 사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어떻게 선죽교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하여 사진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보고자 사진의 메타데이터(EXIF)를 조회하여 보았습니다.다시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려 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가 이 다리 위에서 이방원(조선 태종)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뒤 다리 밑 개울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하여 이름이 선지교(善地橋)에서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개성은 대나무가 자랄 수 없는 기후이므로 주목할만한 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선죽교의 상판 부분에는 현재까지도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물론 이것이 진실인가는 불명확합니다). 다리가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조선 정조 때로, 정몽주의 후손이 개성유수(留守)로 부임해 온 다음부터입니다. 그때도 남아있던 정몽주의 핏자국이 사람들의 통행으로 지워질 것을 우려하여 다리에 석축을 쌓아 통행을 막고, 옆에 통행인들을 위한 다른 다리를 설치(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에 살짝 보이는 부분)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선죽교 북동쪽(사진 상 선죽교 석축 위)의 비석은 왼쪽부터 하마비(下馬碑), 기적비(記蹟碑), 선죽교(善竹橋) 비석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비각 두 개는 정몽주와 관련된 내용의 비석을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말에서 내리라는 안내 표석입니다. 주로 왕궁이나 관청, 규모가 큰 서원 및 향교나 종교 시설 앞에 설치되는 비석입니다. 기적비는 공적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선죽교 비석은 이 다리의 이름을 알려주는 안내 표석입니다. 근처의 숭양서원이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조선말까지 유지되던 대형 서원이었으므로 선죽교 역시 조선시대에 성역화되었을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다리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하마비와 기적비가 근처에 있는 이유가 이해되기는 합니다. 조선시대부터(정확히는 사림파가 조선 내에서 영향력이 확대된 이후부터)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선죽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학자들은 선죽교를 크리스천이 골고다(Golgotha) 언덕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게임 관련 활동 중에 뜬금없이 뜻밖의 장소를 보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마음이 교차하였습니다. 비록 약 6년 반 전이지만 비교적 최근의 선죽교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직접 저 장소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선죽교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동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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