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은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유학(성리학)이 보급된 지역에서 운영되었었던 교육기관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서원은 교육기관의 역할 외에도 유학의 성현을 중심으로 지역 또는 집안(문중)의 위인을 모시는(배향) 역할을 추가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원 주변 지역의 사회 지도층(전·현직 관리, 지역 유력자 및 문중 등) 및 지식인 계급이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이자, 향약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통제하고 설정, 교화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다만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지역의 유력자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등 폐단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이 시행되며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이 문을 닫게 되었었습니다. 다만 600여 개가 넘는 서원 건물이 모두 한 번에 철거된 것은 아니고, 서원에 대한 특혜를 몰수하고 건물을 폐쇄 또는 철거하는 식으로 철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서원은 다시 개원을 허락받는 등의 일도 있었고요.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이와 같이 서원이 철폐되는 험난한 과정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서원입니다. 도산서원은 조선조의 대 유학자이자 사후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한 퇴계 이황이 직접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으로, 그 상징성과 위상이 남다른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안동의 주요 상징물이자 지역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며, 넓게는 한국 전통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서원 시설의 정비도 깔끔하게 되어 있고, 2019년에는 한국의 서원 항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는 등 아직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이곳을 가 보지는 못 하였지만, 몇 년 전 도산서원에 갔을 때의 감동이 생각나 게시물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도산서원 사진을 모두 찍은 것은 아니므로 서원의 구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안동군청 도산서원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서원 남쪽 낙동강 맞은편에 위치한 시사단입니다. 조선조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서원의 부속 건물은 아니지만 도산서원에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건축물입니다. 원래 저렇게 높은 터에 존재하던 건물은 아니고,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설명에 따르면 안동댐 건설 시 침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10m 높이의 축대를 쌓아 비각과 비를 옮겼다고 합니다. 터를 돋우어 둔 덕분에 이색적인 느낌과 함께 마치 이 지역의 중요한 종교시설처럼 보입니다.
도산서원 앞 쪽의 전경입니다. 지형의 고저차와 수목으로 인해 드론 등의 도구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건물 전체를 조망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원 정면에는 오래된 거목들이 몇 그루씩 존재합니다.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산서원 내에 있는 도산서당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간입니다.
도산서당의 관리를 위해 노비들이 거처하던 고직사(庫直舍)입니다. 위쪽 도산서원의 고직사와 구분하기 위해 하고직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판각(藏板閣)입니다.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주 용도가 거주가 아닌 목판의 보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거주시설과 다르게 바닥에 온돌 구조가 없습니다. 아쉽게도 안쪽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서원 내의 건물들은 지형의 고저차에 따라 높이가 다릅니다. 조선시대부터 복층 한옥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보면 이처럼 기와지붕이 겹겹이 보이는 구조가 흔한 편입니다. 서원은 궁이 아닌 일반 민간 건축물이기 때문에 내부에 나무가 꽤 많이 심겨 있습니다.
도산서당 내 하고직사 앞에 있는 농운정사(隴雲精舍)입니다. 제자들이 거주하던 장소로, 현대로 치면 기숙사와 같은 시설입니다.
농운정사는 한자 공(工)의 형태로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부분은 마루입니다. 관란헌(觀瀾軒)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 저 마루에 앉아 창 밖을 보면 낙동강의 물결(瀾)이 보여서(觀)……라기보다 맹자에서 나오는 '물을 보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구절을 따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산서당 영역을 지나 도산서원 영역으로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전교당(典敎堂)입니다. 서원에서 중심이 되는 장소로, 모여서 공부를 하던 건물입니다. 건물의 칸이 4칸으로 도산서원 홈페이지에서는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면에서 보았을 때 안정적인 구조는 아닙니다. 다만 제일 왼쪽 온돌방이 원장의 거실 용도로 쓰였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는 구조이기는 합니다. 현대에서도 학원에 들어가면 학생 강의실 한쪽으로 선생님들이 학부모 면담이나 수업 준비를 하시는 공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는 하니까요.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당대의 명필로 유명한 한호(한석봉)의 글씨로,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현판입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서원 중 왕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부르는데, 공식적으로 세금 및 부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서원 서측의 길입니다. 왼쪽으로는 하고직사, 오른쪽으로는 옥진각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원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옥진각(玉振閣)은 엄밀히 말해 도산서원의 건물은 아니고, 이황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새로 건립된 장소입니다. 자세히 보면 목조 건물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세워진 시기가 1970년대이고 서원 건물 양식과의 통일성을 고려한 외장을 갖추려고 노력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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