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문충공(文忠公)
조선을 포함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왕이나 신료, 존경받는 유학자가 사망한 뒤 그들을 기리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아 시호(諡號)를 주곤 하였습니다. 정부(조정)에서 논의한 결과를 토대로 왕(황제)이 결정하여 선대 왕(황제)에게 올리거나, 신민들에게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묘호(廟號)인 세종(世宗)으로 잘 알려진 조선의 4대 왕 이도(李祹)의 시호는 명나라 황제가 내린 장헌(莊憲)과, 아들인 문종이 재위 중 지어 올린 존시(尊諡)인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모두가 해당됩니다.
일견 복잡하게만 보이는 시호는 아무렇게나 결정하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생전의 행적과 업적에 근거하여 사용할 글자를 결정하였었습니다. 물론 왕이나 황제는 선대의 권위를 높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화려한 수식어를 덧칠하기도 하였지만, 신민(신료와 학자 모두 포함)에게 내리는 시호는 '당시 사람들이 평가하는' 그 사람의 생전 업적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정치를 잘한 경우는 문(文), 전쟁에서 공이 있는 경우 무(武), 군주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 경우에는 충(忠)이 들어가는 식입니다. 조선과 대한제국에서는 총 301자의 글자를 시호를 정할 때 사용하였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군주의 신하(신민)로서 시호를 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물론 시호를 정하는 방법(시법)에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진 글자도 있어 간혹 고인 능욕……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지만, 시호를 받을 정도면 대부분 살아있을 때 큰 죄에 연루됨이 없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거나 이름을 떨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위에 설명한 대로 시호에 쓰이는 글자의 의미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시호 간에도 나름 급(?)이 있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중요시하는 충(忠)과 효(孝)가 들어간 시호는 모두 좋은 시호이지만, 충성을 바치는 대상인 국가에서 인정하여 내리는 것이 시호인 만큼 나라에 공이 큰 사람, 특히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충성을 바친 사람에게 내려진 충(忠) 자가 들어간 시호는 상당히 명예로운 시호입니다. 예를 들어 세조 때 단종을 복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은 당대에는 역적으로 사형되었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 모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여겨져 아래와 같은 시호를 뒤늦게 받았습니다(후대 추증).
충문공(忠文公) 성삼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
충렬공(忠烈公) 하위지
충간공(忠簡公) 이개
충경공(忠景公) 유성원
충목공(忠穆公) 유응부
그리고 그 공을 어떻게 세웠느냐 역시 중요한 항목입니다. 예를 들어 영조 재위 시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도 육군의 총 지휘자)였던 이봉상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항복하지 않고 살해당했는데, 충민공(忠愍公)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민(愍)은 나라의 우환을 만난 경우를 의미하는 글자로, 충민이라는 시호는 "나라의 우환을 만나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아주 훌륭하고 좋은 뜻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의 빛나는 공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다" 외에 대답하기가 애매할 경우 붙는 시호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지배층은 크게 문반(文班, 문신)과 무반(武班, 무신)의 양반(兩班)으로 나뉘었습니다. 따라서 신하로서 세울 수 있는 공적 역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문신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무난하게 영광스러운 시호는 문(文), 무신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는 무(武) 또는 장(莊)입니다. 이 글자가 들어간 시호를 받은 분들이라면 본인의 업무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인정을 받은 분들이라고 유추하여 볼 수 있습니다.
위의 법칙에 따라 "이 사람의 업무분야에서 고르게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으며, 목숨을 바칠(잃을) 정도로 나라에 충성하였다"라는 의미로 내려지는 시호는 크게 문반 계열의 문충(文忠, 또는 충문)과 무반 계열의 충무(忠武)로 나뉨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시호 별로 대중에게 특히 유명한 인물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문충공 : 정몽주(후대 추증), 조준, 권근, 유성룡, 이항복, 최명길 등
충무공 : 이순신, 김시민, 정충신 등
고려 및 조선조 문충공의 명단은 아래 게시물에서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충무공 명단은 없네요). 빠진 분들도 몇 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명단은 아니지만, 딱히 정리된 게시물은 없는 것으로 보여 해당 링크를 첨부합니다.
모든 시기에 걸쳐 시호를 받은 사람들이 고르게 존재하기는 하지만, 주로 임진왜란, 정묘호란과 같이 국가의 존망을 건 시기나 왕조 교체기에 해당 시호가 많이 내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활동해야 하는 시기이니만큼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영광된 시호 중 하나인 문충공을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지 궁금해집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편찬되어 내용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고종, 순종 시기의 조선왕조실록이지만, 시호나 작위 수여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왜곡의 여지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그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록이 전부 번역되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기에 이러한 사실을 찾아보기가 너무 편해진 점이 좋습니다.
엄격하게 '조선국'으로 한정할 경우 마지막 문충공은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입니다(이전 시기 인물의 추증 제외).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2월 17일 병술 6번째기사 1874년 조선 개국(開國) 483년 정원용은 문충공, 김흥근은 충문공이라는 시호를 추증하다(조선왕조실록)."
* 비슷한 성격의 충문공(忠文公)은 고종 25년(1888년) 11월 7일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과 사후 이조 판서로 추증된 김춘택이 충문공으로 함께 추증된 것이 마지막입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 34년) 대한제국까지 범위를 넓힐 경우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사실 대한제국까지 보는 쪽이 더 역사적 해석과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대한제국은 조선과 국체가 분리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국가의 주권자인 고종이 동일한 인물이고, 대한제국의 헌법 격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2조에서 "대한 제국(大韓帝國)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다."라고 정의하여 대한제국은 조선과 연속성이 있는 나라임을 스스로 공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최초의 문충공은 이재순입니다. 왕실 종친으로 청안군(淸安君)이라 불렸으며, 예조 및 형조판서, 궁내부대신 등을 역임하고 일본 및 친일 세력이 장악한 경복궁에서 고종을 탈출시키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의 참가자 중 하나입니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3월 8일 양력 4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이재순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조선왕조실록)."
* 대한제국 최초의 충문공은 광무 2년(고종 35년, 1898년) 10월 24일 의정을 역임하였던 김병시가 최초로 추증되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의정(영의정, 내각총리대신, 의정대신과 동급)을 지낸 윤용선, 을사조약 체결 항의의 뜻으로 자결한 유학자 송병선(사후 의정대신으로 추증), 대한제국 초대 의정대신이자 공작(청녕공)인 심순택 등이 문충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1월 2일 양력 2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윤용선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2월 14일 양력 2번째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송병선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4월 5일 양력 3번째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심순택에게는 문충공, 윤태원에게는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주다(조선왕조실록)."
* 충문공의 경우 사후 의정 대신으로 추증된 민영환이 광무 9년(고종 42년, 1905년) 11월 30일에 마지막으로 추증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종 시기에는 단 한 명의 문충공만이 존재합니다. 그 사람의 관직은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태자태사(太子太師)였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도 많은 관직을 맡았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초대를 포함 총 4회 역임)이자 추밀원(국왕 자문기관) 의장(초대를 포함 총 4회 역임), 귀족원(상원) 초대 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국무총리 4회, 대통령 직속 자문회의 의장 4회, 국회의장 1회를 역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거물 정치인은 을사조약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기도 합니다. 이쯤 소개하였으면 다들 이미 정체를 알고 계실 것 같긴 하지만, 굳이 이름을 언급해야겠네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입니다.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0월 28일 양력 1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태자 태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조선왕조실록)."
위 기사에서 순종의 조령(詔令, 황제 또는 왕이 내리는 글)을 보면 문충 시호를 추증한 사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 태자태사 이토오 히로부미는 뛰어난 기질에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지녔고, 시대의 운수를 만회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맡아 나섬으로써 단연 동양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일찍이 평화로운 큰 국면을 이룩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더욱이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의를 돌렸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하여 나갔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큰 계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난번에 통감(統監)으로서 대궐에 상주하여 있으면서 수시로 만나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였으며 태사의 임무를 맡아 우리 태자를 보좌하고 인도하여 예학(睿學)을 진취시키는 데 모든 것을 다 하였다. 노령(老齡)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동반(同伴)하여 순행하였으며 휴식할 사이도 없이 계속하여 만주로 행차하였다. 속히 무사히 돌아오면 길이 의지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의 변고가 생겨 놀라운 기별이 문득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놀랍고 아픈 마음 끝이 없다."
즉 대한 제국을 위하여 뛰어난 능력(정치력)을 발휘하였기에 문(文), 휴식할 틈도 없이 분골쇄신하다 변고(암살)를 당했으니 충(忠)입니다. 1909년, 대한제국 멸망이 채 1년도 남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후 태자에게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따라 3달간 상복을 입도록 명하고, 조위금(부조금) 10만 원을 하사하였습니다.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0월 29일 양력 5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황태자에게 이토 히로부미 태사의 죽음에 대하여 석달복을 입도록 하다(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0월 30일 양력 1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이토 히로부미의 상사에 조위금을 주다(조선왕조실록)."
그 뒤 고종이 직접 조문을 갔으며, 추도회를 장충단에서 열었습니다.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1월 4일 양력 2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태황제가 통감의 관저로 행차하다(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3권, 순종 2년 11월 4일 양력 3번째기사 1909년 대한 융희(隆熙) 3년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를 장충단에서 가지다(조선왕조실록)."
참고로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일본군 및 낭인 등과 맞서다 순국한 조선군들을 모시기(제향하기) 위해 만든 단으로, 일종의 현충원과 비슷한 시설입니다. 즉 "국가를 위한 순국한 인물"로 대우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였는데, 이때 고종의 퇴위를 조장한 주요 인물 중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참…… 물론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는 비참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추증하는 시호 중 문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 중 하나인 문충을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점은 여러 모로 씁쓸한 기분이 드네요.
p.s. 절대 일어날 일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만약 우리나라 방식으로 이토 가문에서 제사를 지낸다면 불천위제사를 지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신청하거나 허가해 줄 나라도, 유림도 이제는 없지만 무려 "조선의 마지막 문충공"이기 때문에 불천위제를 지내려고 한다고 말하면 감히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일본 제국에서는 장충단 자리에 위 사진의 춘무산박문사(春畝山博文寺)를 세워 우리나라의 불천위제사처럼 국가적으로 영원히 그를 기려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기는 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당 건립 또는 종묘 배향 쪽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행히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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