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가볼 만한 곳│보성여관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세워진 건축물로, 현재 국가등록문화재 1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단순 관람과 숙박 이 모두 가능한 곳으로, 당시에 시간 여유가 좀 있었기에 하루 숙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붉은색의 보성여관 팻말이 잘 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여관이 위치하고 있는 벌교읍은 행정구역이 보성군으로 묶여있지만 보성읍과는 생활권이 구분되는 동네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원래 이 지역은 낙안군에 속하던 곳이었고요. 하지만 이 건물이 지어지던 당시인 1935년에는 이미 보성군으로 정착된 지 30여 년 가까이 지났을 때라 보성여관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보성여관의 입구입니다. 박공 형태의 지붕에 함석이 올라가 있고, 아래 벽면에 널빤지가 노출되어 있는 모습이 이국적으로 느껴집니다. 왜식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근대건축물이지만 적산가옥이라고 구분하면 안 되는데,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만든 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관은 조선인이 만들었거든요. 해방 시점에 누구의 소유였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의 소유가 아니었다면 적산가옥으로는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 쪽 숙박동 및 정원으로 가는 길이 보이고, 양 옆으로 카페와 소극장이 바로 보입니다.
카페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 사진 찍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소극장의 모습입니다. 행사가 없을 경우에는 카페로 이용되거나, 숙박한 손님들의 조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건물 겉면의 직사각형 유리창은 일본 양식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양식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인류가 19세기부터 유리창을 대중화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이 시기의 상당 기간이 일제강점기와 맞물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당장 덕수궁 석조전에만 가 보아도 저 형태의 유리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널빤지로 마감된 천장은 일본 가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공연이 없을 때는 무대 위에 저렇게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공연이 있을 땐 치우겠지요.
조식은 토스트와 계란, 녹차(커피)를 제공합니다.
건물 안쪽에는 전시실이 별도로 있는데, 벌교의 역사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앙정원 쪽으로 나아가 보면,
벽면에 노출되어 있는 널빤지에서 이 건물이 일본식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직선이 많이 강조된 건물입니다.
숙박동인 1동 제석산의 방 입구입니다. 정원에 들어가는 문 바로 우측에 있습니다. 보성여관에는 총 7개의 숙박동이 있는데 1, 2, 7동은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이 제공되지만 3, 4, 5, 6동은 공동화장실과 공동샤워실을 사용하여야 하니 예약 시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벽면에 붙어 있는 안내도입니다.
창틀 위쪽에 나무로 만든 처마가 인상적입니다.
여관은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숙소는 온돌로, 침구류도 깨끗하고 기타 편의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습니다.
숙박동 안쪽 역시 바닥이 다다미가 아닌 점만 제외하면 일본식 건축물의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정말 네모 반듯한 배치가 돋보이네요.
대청마루가 있는 2동 오봉산의 모습입니다.
건물 뒤쪽으로 굴뚝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숙박동에 난방을 하면 저 굴뚝을 통해 연기가 나갔을 것 같은데, 장작을 쓰지 않는 요즘에야 별다른 사용 용도가 없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처마 바로 밑으로 물이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않고, 지붕의 빗물이 별도의 위치로 모이도록 함석 물받이관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뒤쪽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일반 창이나 미닫이문과 달리 여닫이문은 한옥 양식이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확실히 왜식 건물이에요.
대청마루의 천장입니다. 전통 방식의 대청마루는 천장 부위에서 지붕의 하단과 서까래를 볼 수 있지만, 여기는 널빤지로 천장을 마감하였기에 앉아서 하늘을 보면 확연히 다른 느낌입니다.
건물 2층에는 다다미방이 있습니다.
여관 바깥에서 보이는 다다미방의 모습입니다.
올라가는 길은 꽤 좁습니다.
원래 이곳은 여관에 숙박하던 손님들이 차를 마시기 위해 이용하던 공간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올라가 보면 좁은 복도 옆에 다다미방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측 창가로는 여관의 중정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ㄷ자 모양의 건물 배치와 넓게 깔린 일본식 기와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일본식 기와가 우리나라의 전통 기와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질감이 드는 이유는 우선 우리나라의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분리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일본식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합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와는 암키와 사이를 수키와로 덮어 고정하므로 수키와 전체가 온전히 다 노출되어 보이는 것에 반해, 일본식 기와는 암키와와 합쳐진 수키와 부분을 옆 암키와 부분에 거는 방식으로 기와를 쌓기 때문에 일본식 기와가 상대적으로 암키와 부분이 더 넓어 보이거든요. 또한 기와의 두께도 우리나라보다 더 얇습니다. 사실 이 일본식 기와 역시 전통적인 의미의 일본식 기와는 아니고, 19세기 즈음부터 일본에서 개량하여 만들어진 기와 양식입니다. 오래된 일본 건축물을 보면 암키와와 수키와가 분리되어 있어 오히려 우리나라의 전통 기와지붕과 더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다미방의 모습입니다.
예전 여관을 운영하였을 땐 가운데의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분리하여 다실을 운영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다(茶)가 무슨 차였을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총 4개의 다실이 있고, 각 실마다 8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습니다. 즉 8첩(疊, 畳) 방인 셈입니다. 예전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씨워진(쓰인) 시'에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육첩방이 무엇인지 몰라서 궁금해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세월의 흔적은 조금 느껴지긴 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다미의 특성상 주기적인 교체가 필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주기적으로 갈아준다는 것 자체가 매우 훌륭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말이므로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한쪽 구석에는 각종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만들었을까요. 여기에서 수업이 있었던 것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반대쪽에서 바라본 2층의 전경입니다. 보성여관은 위치도 벌교읍 중심가 근처이고, 근대건축물 문화유산 중에서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편이며, 무엇보다 아직도 본래의 목적인 숙박 및 찻집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현재는 형태만 남아 관람만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보성여관은 실제로 체험이 가능하니까요. 시설도 굉장히 깔끔하고요. 다만 걱정 아닌 걱정이라면, 이 시설은 분명히 적자이지 않을까 싶은 점 정도가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오랜 기간 동안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보성여관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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