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가볼 만한 곳│영남루, 천진궁


  영남루는 보물 제147호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누각입니다. 누각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는데,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규모를 크게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누각은 1844년(조선 헌종 10년) 중건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존재하였던 누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을 찾아 그 수려함과 웅장함에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영남루 전경
  하지만 저는 영남루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몰랐었습니다……. 이곳을 가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으니까요. 우연히 밀양에 가게 되어 별생각 없이 밀양교를 건너다 저 큰 누각을 발견하였고, 마침 한가했기에 방문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왜 저 길을 굳이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영남루 정면 전경
  영남루는 크게 세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운데의 큰 건물이 누각이고 양쪽의 두 건물은 일반 가옥의 형태이며 모든 건물은 누각과 이어져 있습니다.

공영주차장
  영남루 서북쪽에 공영주차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주차한 뒤 누각으로 바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저는 주차장 후면 길을 따라 누각으로 향했습니다.

들어가는 길
  이렇게 간 이유가 딱히 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들른 곳이라 정보가 하나도 없어 길을 몰랐을 뿐입니다. 나중에야 영남루로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박시춘 생가
  하지만 덕분에 영남루 뒤에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던 박시춘의 옛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 좋은데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점이 걸리는 인물입니다.

안내판
  영남루 입구로 알고 있던 후문에는 "밀양아리랑길"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2023년 현재 공식적으로 "영남루 수변공원길"이라고 부르는 듯합니다.

영남루 후면
  뒤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모습입니다. 왜 가옥 형태의 건물이 있냐 하면,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로 이용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객사는 해당 지역에 방문하는 관리들이 임시로 머무는 숙소로, 가끔은 외국 사신들도 와서 머무르던 장소입니다. 물론 이 객사에 외국 사신이 왔을 일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국(명, 청)의 사신들이 영남 지역까지 올 이유가 없고, 일본의 사신들은 임진왜란 이후 서울 상경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영남루 후면 전경
  이렇게 멀리서 쳐다보면 의외로 그렇게 큰 건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누각 전경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생각보다 누각이 크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누각의 가로가 5칸(기둥 6개)이기 때문입니다. 영남루 칸의 가로길이는 약 3.5m~4m 정도로 일반적인 한옥 칸의 길이인 2.4m보다 약 1.5배가량 길고, 천장의 높이도 훨씬 높습니다. 따라서 멀리서 보았을 때는 평범한 5칸의 한옥과 건물의 비율이 유사하게 보이므로 약 12m 길이의 건물로 보이는데, 가까이 갈수록 약 20m 수준의 긴 길이가 새삼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각 처마 및 공포
  처마 밑의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가 인상적입니다. 지붕과 처마의 무게가 평범한 한옥보다 무겁다 보니 공포의 크기 역시 커졌습니다.

누각 현판
  가운데 현판에 "영남루(嶺南樓)"라는 누각 이름의 현판이 걸려있고, 현재 시점에서 가운데 현판 좌측에는 "교남명루(嶠南名樓)", 우측에는 "강좌웅부(江左雄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교남명루는 영남루를 가리키는 말이며, 강좌웅부는 밀양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현판 밑에 누각의 입구가 보이지만 저곳으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동편 입구
  누각에 오르려면 누각 동편의 입구를 통해야 합니다.

능파각 현판
  누각 동편의 건물은 능파각(凌波閣)인가 봅니다. 현판에 단기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광복 이후 제작된 현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능파각 정면
  영남루에서 능파각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영남루 바로 옆에 붙어있다 보니 아담하고 평범한 건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그리 작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충분히 화려한 건물이었습니다. 특히 누각 옆에 붙어있는 건물이다 보니 건물 가장자리의 마루의 비중이 꽤 크며, 마루 가장자리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 건물을 더욱 화려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래기와
  처마의 추녀 끝 사래를 장식하는 사래기와가 마치 사람의 얼굴을 묘사한 듯한 모습입니다. 약간 멍한 표정인 것 같아서 보고 있기가 즐거웠어요.

용금루 현판
  누각 안에는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마 이곳을 찾은 유명 인사들이 남긴 글 또는 문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각 현판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현판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무슨 뜻이며 누구의 글씨 또는 말인지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어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저 현판은 용금루(湧金樓)라고 읽습니다.

현창관 현판
  저 현판은 현창관(顯敞觀)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누각 가운데의 넓은 공간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영남제일루 현판
  이 현판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입니다. 영남루의 이름이 경상도의 다른 명칭인 '영남'에서 따 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해지는 이름의 유래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 이 부지에 있던 영남사라는 절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저 현판은 '영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므로 이 현판의 영남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의 남쪽 지역인 경상도를 가리키는 구절이 맞습니다. 물론 영남사라는 절 자체가 영남이라는 지역에서 이름을 따와 지은 절일 수도 있겠지만, 삼국시대에 이 지역을 영남이라고 불렀나까지는 제가 알 수 없어 무엇이 맞는지까지는 알지 못하겠네요.

누각 내부 단청
  누각이라 그런지 통상적으로 단청을 칠하지 않는 지붕 안쪽 내부까지 녹색과 적색의 단청 칠을 해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체 불명 현판
  이 현판은 글씨가 너무 작아 내용이 잘 보이지 않네요.

누각에서 바라본 밀양 시내
  현판 밑으로는 밀양강 북측과 맞닿아 있는 밀양 시내의 풍경이 보입니다. 

영남루 현판
  남측에 달려 있는 현판에는 이 누각의 이름인 영남루(嶺南樓)가 새겨져 있습니다. 저 현판은 화재로 소실된 영남루를 1844년 중건한 밀양도호부사 이인재의 아들인 이현석이 7살에 쓴 글씨라고 합니다. 이제는 만 나이로 나이를 세니 5~6살이 맞겠네요. 대단합니다.

밀양강
  영남루 자체가 높은 언덕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좋고, 전면에 밀양강을 끼고 있어 시야를 가리는 지형지물이 없습니다.

밀양강과 밀양교
  이곳에서 술을 한 잔 걸치면서 밀양강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정말 흥취가 절로 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문화재 위에서 음주가무를 즐길 수는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해 보았네요.

화려한 공포
  공포는 기둥마다 있었으며,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매우 크고 화려합니다.

누각 내부 기둥
  영남루의 기둥은 남쪽과 북쪽 각 면에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붕의 무게가 워낙 무거울 테니 이중으로 기둥이 있어야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측 통로
  영남루 우측에는 서편의 건물 쪽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미확인 현판들
  저 현판들이 도대체 무엇일지 궁금하였으나, 글자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 데다 높이 달려있기까지 하니 도대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네요.

동편에서 바라본 영남루
  동편 능파각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모습입니다. 

아래쪽에서 바라본 영남루
  누각 아래로 내려와서 영남루를 바라보았습니다. 크기만으로도 국내에 비교할만한 누각이 몇 없을 듯한 모습입니다.

누각 아래 기둥
  누각 아래의 기둥입니다. 기둥이 없는 누각 한가운데의 아래쪽에도 기둥이 빼곡하게 깔려 있습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입니다.

누각 아래 추가 기둥들
  특이한 점은 가장자리의 기둥 역시 가운데 기둥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기둥이 마루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통상적으로 하중을 가장 많이 받아주어야 하는 기둥은 전체를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영남루의 경우 누각이 너무 크다 보니 그만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둥과 마루 결합부
  기둥은 홈을 파 나무끼리 끼워 맞추는 방법으로 마루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누각 주변 난간
  누각 주위의 난간 역시 곡률을 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여 두었습니다.

연결 계단 위 지붕
  서편의 침류각으로 연결된 계단 위에도 지붕이 있는데, 계단의 높이에 맞추어 3개의 층을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층을 둔 지붕
  지붕 자체는 수평으로 배치하되 층을 둔 구성이 특이하여 한참을 구경하였습니다. 저 계단을 통하면 비를 맞지 않고도 누각과 서편 건물을 오갈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인물사진을 찍어도 꽤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입금지라 올라가 보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쉽네요.

남서쪽에서 바라본 영남루
  영남루의 처마와 추녀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주위 건물과 계속 처마가 겹치는 구도가 많이 나와 꽤 특이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침류각 전경
  영남루 서편의 건물입니다. 이곳은 동편의 능파각과 달리, 밀양강 측으로만 넓게 마루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능파각의 마루와는 달리 이쪽에서는 마루에서도 식사나 음주를 할 만한 공간이 있습니다. 무엇이 더 좋다기보다 각각의 매력이 있는 숙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침류각 현판
  이 건물의 이름은 침류각(枕流閣)이라고 부릅니다.

침류각 처마
  한옥을 구경할 때면 으레 한 번은 찍어 보게 되는 구도입니다. 이 구도는 언제 찍어도 항상 멋있습니다.

침류각 온돌
  숙박을 위한 건물이니만큼 역시 온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단 전경
  올라가 보지 못해 끝까지 미련이 남았던 계단을 뒤로하고 이제 영남루 주위를 조금 더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침류각에서 바라본 영남루
  침류각 쪽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모습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침류각 북쪽으로는 별도로 만들어진 마루가 없습니다.

영남루 정문
  그리고 그때에야 발견했던 영남루의 정문입니다. 몰랐어요, 저기가 정문인 줄…….

사주문
  정문은 기둥이 네 개이므로 사주문(四柱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절의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라서 일주(一柱)가 아니라, 두 개의 기둥이 일렬로 서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부릅니다.

영남루 북측 사당
  영남루의 맞은편, 북측에는 웬 사당이 하나 있습니다.

천진궁 전경
  이름은 천진궁(天眞宮)입니다. 사당에 '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렇지만, '천'과 '진'역시 건물 이름으로 쉽게 붙여쓰기에는 어려운 한자라 무슨 용도의 건물일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천진궁 안내판
  아…… 모시는 분들의 격이 매우 높은 사당이었네요. 단군과 역대 왕조(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시조 8명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었습니다. 다만 이 건물이 사당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52년부터로, 그전까지는 객사의 부속 건물 등으로 활용되었었다고 합니다.

천진궁 앞 비석
  건물 앞에는 비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천진궁 본당
  천진궁 본당의 모습입니다.

천진궁 내부 모습
  안에는 가운데 단군의 위패와 어진이 놓여 있고, 좌우측 벽면에 역대 왕조 시조들의 위패가 있었습니다.

아랑사 전경
  영남루 남쪽의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아랑사(아랑각)이라는 사당이 있었습니다. 예전 억울하게 죽은 아랑이라는 처자의 넋을 달래 주기 위한 사당입니다. 이 처자의 이야기를 흔히 아랑전설이라고 부릅니다. 그 간단하게 내용을 서술하여 보자면, 아랑이라는 아가씨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후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부사들에게 하소연하고자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바람에 새로 부임 오는 밀양 부사들이 계속 놀라서 죽었는데, 담력이 센 신임 부사가 내려와 아랑의 억울한 이야기를 듣고 그 원한을 풀어 준다는 내용의 전설입니다. 이는 유명한 조선시대의 소설인 장화홍련전과 그 내용이 상당히 유사한데, 실제로도 장화홍련전의 근원설화(밑바탕이 되는 이야기)로 꼽는 이야기가 이 아랑설화입니다.

아랑사 정문
  들어가 볼 시간까지는 없어서 그냥 지나쳐 오기는 했지만, 교과서에서만 배우던 아랑전설의 주인공을 모시는 사당을 우연히 보게 된 점이 새삼 신기했습니다.

밀양관아 정문
  영남루 바로 옆은 아니지만, 북쪽으로 약 1~2분 정도 걸어가면 밀양관아지가 나옵니다. 밀양은 조선 말기 즈음까지 도호부였던 지역이었으므로, 저 관아에서 근무하던 최고 등급의 관리는 대부분 도호부사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또'로  통칭하여 알고 있는 지방관은 실제로 부사, 대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및 현감 등의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해당 지역의 행정구역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써 보자면, 조선에서는 8개의 도 안에 수백 개의 군현을 설치하여 관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군현은 현재의 기초자치단체(시, 군에 해당하는 지역)와 유사한 지역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해당 지역의 인구 및 지리, 군사, 역사적 중요성 등을 감안하여 각 지방의 군현을 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부와 대도호부는 수도인 한성부까지 포함시켜도 십여 개에 불구한 지역이었으므로 현재의 특별시 또는 광역시와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으며, 목은 한 개의 도에 많아야 최대 다섯 개 이내인 행정구역으로 각 도의 이름은 으레 해당 도에 속하는 부, 대도호부, 목의 지명을 따서 짓곤 했습니다. 삼남 지방을 예로 들면 충청도는 충주목과 청주목의 앞글자를, 경상도는 경주부와 상주목의 앞글자를, 전라도는 전주부와 나주목의 앞글자를 따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밀양이 도호부였다는 말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에 대도시까지는 아니지만, 중견급의 규모를 가진 도시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2023년 현재 밀양시의 인구는 약 10만 명 정도로, 이미 과거 시로 승격되었으니 망정이지 지금의 인구로는 시 승격을 추진해 볼 수조차 없는 규모의 작은 도시입니다. 단순히 인구 규모로만 비교하여 보았을 때,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규모가 현재의 밀양시보다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밀양관아 이야기를 조금 하려다가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샜는데, 영남루와 밀양 관아가 가까우니 시간이 된다면 둘 다 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원래 하고 싶던 이야기였습니다.

강 건너 바라본 영남루
  밀양강 남쪽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모습입니다. 영남루 오른쪽 아래로 아랑사가 보이고, 영남루 동쪽 옆, 아동산 중턱에 있는 건물은 무봉사라는 사찰입니다

영남루의 크기
  현대의 건축물과 비교해도 전혀 작아 보이지 않는 영남루의 크기는 정말로 대단합니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위치 선정도 정말 환상적인 누각입니다. 게다가 누각에서 연회를 즐긴 손님(관리)들이 바로 쉴 수 있는 방이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대형 누각 옆에 객사가 바로 붙어 있는 구조는 아마 영남루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굿바비 조형물

  영남루의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분홍색 인형의 정체는 밀양국밥 캐릭터 '굿바비'라고 합니다. 밀양시가 돼지국밥에 상당히 진심임을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우연히 들른 곳에 이러한 보물이 숨겨져 있어서 한참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남루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밀양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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