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가볼 만한 곳│국립부여박물관│전시물(소장품)
<국립부여박물관> |
국립부여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의 박물관으로, 약 만 칠천 점가량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부 야외 등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도 존재하지만, 상설전시되어 있는 대부분의 유물은 4개의 전시실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제1전시실부터 제4전시실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각각의 전시실마다 개별적인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전시실>
제1전시실은 백제의 선사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은 백제의 선사시대라기보다 부여 지역에 한정된 선사시대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백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백제는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이래 약 400여 년 간 서울의 위례성에 수도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선사시대 유적은 사실상 거의 다 서울에서 발견되는 것이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제 멸망 직전의 백 년 조금 넘는 기간인 6~7세기 동안에만 백제의 수도로 기능했었던 부여의 선사문화는 백제국 고유의 유적이라기보다 백제에 합류하기 전 이곳에 존재하던 마한(馬韓) 소국들(후한서의 기록 상으로는 54개)의 유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간돌검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 칼처럼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들을 주로 마제석기(磨製石器)라고 불렀었는데, 많은 전문용어들이 점점 순화되는 과정에서 명칭이 바뀌었더라고요.
청동으로 만든 꺽창이나 모 유물도 있었습니다. 청동기는 제작 단가가 비쌌기 때문에 저 시대를 비록 청동기 시대라고 부르지만 무기나 제례용 도구가 아닌 이상 청동으로 만든 기구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제2전시실>
제2전시실은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던 백제 후기 시대의 유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백제가 위례성(서울)을 고려(고구려)에 빼앗기고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을 때와는 달리, 사비(부여)로의 천도는 백제가 어느 정도 국력을 되찾은 뒤 웅진의 입지가 한 나라의 수도로는 좋지 않다는 점 때문에 계획적으로 이전하였을 것으로 추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여의 유적들은 다시 중흥기에 접어든 후기 백제의 문화적 역량이 화려하게 투영되어 있으며, 비록 수많은 유물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걸작으로 손꼽을 수 있는 유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입니다. 안타깝지만 능산리에 있는 고분들은 대부분 도굴된 뒤에 학술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아 있는 유물이나 정보의 양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 향로는 박산로의 일종으로, 향로 뚜껑에는 산봉우리와 함께 동물과 사람이 주조되어 있습니다. 저 산봉우리 사이마다 향이 피어오를 수 있도록 10개의 구멍이 나 있으며, 위쪽 새 모양의 장식에 2개의 구멍이 있어 총 12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합니다. 아쉽지만 향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복제품 등을 이용하여 향이 실제로 피어나는 모습을 재현하여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로 하단은 용 모양이며, 용이 향로 밑부분을 물어 향로를 받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향로를 보면 볼수록 그 제작기법이 빼어난 점도 감탄스럽고,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지금까지 전해진 점도 놀라우며, 이처럼 대단한 유물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 역시 신기하기만 합니다.
위의 유물 외에도 능산리 사찰에서는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사찰 운영과 관련된 업무 관련 자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고대의 기록 유산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종류의 유물이 새삼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목간에서 보희사(寶熹寺)라는 절의 이름이 확인되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능산리 사찰'로 명칭을 부르는 이유는, 아마 저 보희사가 능산리 사찰을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 여부가 불분명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유물은 연통모양토기연가라고 하는데,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나오는 연기를 건물 바깥으로 빼기 위해 설치한 연통이라고 합니다. 결국 굴뚝이라는 말인데, 굴뚝 끝도 신경 써서 장식하여 둔 걸 보아서는 상당히 좋은 부잣집이나 사찰, 관청 등의 건물에 설치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입니다. 얼핏 보면 평범한 돌그릇이나 장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물건은 의외로 국보로 지정된 유물로, 지정번호 폐지 이전의 번호는 제288호였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앞면에 새겨진 글자 때문입니다. 글자는 총 20자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의미는 백제 창왕 13년, 그 해의 간지가 정해일 때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뜻입니다. 창왕의 창(昌)은 백제 위덕왕(威德王)의 이름(諱)이며, 위덕왕이 즉위한 지 13년 뒤인 해는 567년으로, 그 해의 간지는 정해년이 맞다고 합니다. 매형공주는 해석에 따라 누이(妹)인 형공주(兄公主) 또는 누이(妹) 중 제일 나이가 많은(兄) 공주로 보기도 하는데, 무엇이든 간에 왕과 직접적인 인척 관계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이 석조 유물은 사리를 보관하는 감실인 사리감으로 용도가 밝혀지게 되었고, 이 사리감의 위치가 능산리 절터의 목탑 부근이었기 때문에 절의 창건 연도를 강력하게 추측할 수 있는 유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절 내부의 탑에 안치하는 시점이 거의 절을 세울 때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부족하여 유물이 출토되어도 시기를 추측하기 힘든 삼국시대의 유물에서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된 점도 매우 중요하고, 이 유물 덕분에 근처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등의 다른 유물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유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사리감의 가치를 높여 주는 이유가 됩니다.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입니다. 동시대의 다른 나라보다 백제는 상대적으로 기록 유물이 그나마 많이 남아있는 편인 듯합니다. 이 유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구단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가 일본에 의해 한반도로 다시 전해졌다는 가설이 있었는데,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구단 기록 유물이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관련 유물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가설이었습니다. 하지만 6~7세기경 제작된 위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위의 가설이 바로 반박되었다고 합니다.
<제3전시실>
제3전시실은 백제의 불교문화에 대한 전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전 제2전시실은 백제 왕실 및 수도로 기능하던 사비(부여)와 관련된 문화재들이 주를 이루고 있던 전시실이며, 제3전시실은 백제 전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불교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제2전시실의 콘셉트와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그건 아마 제2전시실의 능산리 절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거기서 나온 유물들이 워낙 대단한 게 많기도 하지만, 불교문화로 제한하기에는 유물에 담겼다고 추측되는 사상들의 폭이 좀 넓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깊습니다.
제3전시실은 백제 시기 만들어진 석불의 복제품들이 많이 놓여 있었습니다. 뒤쪽 마애삼존불 역시 원본은 서산시에 있는 석불인데, 원본을 훼손하면서까지 가져올 수는 없으니 이렇게 복제품들을 전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백제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금동 불상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크기만 남아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작은 크기인 덕분에 지금까지 파괴되지 않고 있다 발견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금동광배입니다. 가운데의 네모난 구멍을 통해 불상과 연결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머리 뒤의 두광(頭光)이라고 합니다. 안쪽의 연꽃은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바깥쪽의 정교한 무늬는 화염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여 부소산사지에서 발견된 치미(鴟尾)입니다. 기와 건물 꼭대기(용마루)의 양 끝을 장식하기 위한 부재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기와 건축물에는 대부분 치미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건물의 크기가 클수록 치미도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고려와 조선 시기를 거치며 치미를 얹는 문화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취두(鷲頭)와 같이 용마루 끝 부분을 장식하는 기와를 여전히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크기와 형태가 치미와는 많이 다르고, 크기도 작아졌기 때문에 고대 건축물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치미는 부소산사지에서 발굴된 치미를 복원하였다고 하며, 금당(부처님을 모신 절의 중심 건물)에 얹혔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치미가 제대로 발굴되기 어려울만한 것이, 건물이 방치되거나 화재로 인해 무너질 때 저 큰 기와가 멀쩡한 모습으로 땅으로 떨어질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꽃 모양의 와당(瓦當)은 아마 백제 후기에는 굉장히 폭넓게 사용되던 기와였던 것 같습니다. 부여 여기저기에서 출토되는 것을 보면요. 설명에도 사비 천도 이후에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8개의 연꽃잎을 묘사하는 연꽃무늬 수막새가 일반화된다는 말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청동제 탑의 일부입니다. 공양탑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유물의 가치는 뭐니 뭐니 해도 백제시기 건축물의 양식을 일부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돌과 흙으로 된 기와, 주춧돌, 벽돌 등이 발견되고는 있지만 이 부재들이 어떻게 배열되었는지를 알 도리가 없고, 무엇보다 주요 자재인 나무가 다 썩거나 불타버리는 바람에 고대의 건축물은 그 형태를 추측하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건축물 형태의 조형물이 가지는 가치는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백제문화단지 건립 시 이 유물의 형태를 참고하여 탑 등의 건물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자 모양 벽돌입니다.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겉에 조각된 화려한 연꽃무늬와 넝쿨무늬입니다. 또한 벽돌 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구멍으로 보아서는 아마 건물의 내력을 받는 부분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으며, 건물의 외벽 또는 담장 등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제2전시실 최고의 주인공이 백제금동대향로를 중심으로 한 능산리사지 유물들이라면, 제3전시실은 위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한 왕흥사지 유물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의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국보로, 지정번호 폐지 이전의 번호는 제327호였습니다. 이 사리기는 왕흥사 목탑의 심초석(탑 중심기둥의 기초가 되는 돌) 부위에 묻혀 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기 중 가장 오래된 유물입니다. 사리기는 겉의 청동제 사리합, 가운데의 은제 사리호, 안쪽의 금제 사리병의 3겹으로 이루어졌으며, 금제 사리병 안에서 실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위의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과 마찬가지로, 왕흥사 사리기 역시 겉의 사리합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견된 글자는 총 29자로,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그 의미는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으려고 할 때 신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되었다"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창(昌)은 위덕왕의 이름이며, 위덕왕 재위 시 정유년은 서기 577년이므로 이 기록 덕분에 왕흥사의 설립 연도 추정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능산리 사찰의 경우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한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그 정보가 다양하게 활용 가능함에 비해, 왕흥사는 주변에 남아있는 주요 유물이 없어서 저 정보의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이겠네요.
<제4전시실>
제4전시실은 기증유물로 구성된 전시실입니다. 다양한 유물들이 기증되다 보니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폭넓게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위의 거대한 토기는 독널이라고 하는데, 시체를 넣어 묻기 위해 제작한 토기입니다. 즉 관입니다. 아마 몇천 년 전쯤에는 저 토기 안에 주인 분(?)이 계셨을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쩌다 보니 토기만 남아있게 되었네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분청사기 연꽃 물고기 무늬 병입니다. 분청사기철화연어문병(粉靑沙器鐵畵蓮魚文甁)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사실상 같은 뜻입니다. 참고로 저 도자기 안에 그려진 물고기는 쏘가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인동무늬 벽돌, 굽단지 및 각종 기와들이 많이 기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글이 길어져 다루지 못한 유물들이 많으므로, 실제 박물관에서 관람하는 쪽을 적극 추천합니다. 사진이 아니라 실물을 직접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감동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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